최근 한 연구자가 대학교수직을 그만두며 쓴 <대학을 떠나며>라는 칼럼이 화제였다. 대학이 성과 중심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흡수되면서, 교수/연구자의 본업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무익·무능하게 됐는지를 신랄하고도 아프게 고발하는 글이었다. 10여년에 걸쳐 대학원을 졸업하고, 때때로 강사 생활을 전전하며 수료생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나 역시 익히 듣고 경험하는 현실이다.
하지만 내가 그 ‘퇴직’의 의미와 무게를 다 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대학 연구소 정규직 교수의 연봉이 얼마인지, 받는 혜택은 뭔지, 얼마나 많은 행정 업무를 도맡고, 얼마나 많은 논문들을 써내야 하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만큼 같은 업계에 있더라도 학생, 시간강사, 정규직 교수간의 벽은 높고 두텁다.
그럼에도 그 글은 그간 내 주변에서 학계를 떠난 사람들이 남긴 말과 자리를 떠올리게 했다. 사실, 대학원 동료부터 존경하는 선생님, 글로만 접한 학자들까지 연구자들이 업계를 떠나는 장면을 심심찮게 봐왔다. 누군가는 ‘이곳은 더이상 미래가 없다’고 호언장담하며 떠났고, 누군가는 ‘미래가 없는 것은 나’라며 풀 죽은 어깨로 나갔다. 이에 대해 혹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도록 동료인 우리가 더 배려했어야 했다’라며 반성했지만, 누군가는 ‘남은 자에게 모멸감을 준다’며 분노했다.
어떻건 간에 누구나 안정적인 소득과 신분을 갈망하는 이 시대에, 나빠지는 업계 현실을 방관하지 않고 결단을 내리는 일은 용감하며,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떠나는’ 대신, ‘남아서 바꾸기’를 택한다면 어떨까. 당장 업계 전반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자신을 바꾸기로 한다면. 대학의 부품처럼 소비되기를 거절한 채, 자신이 생각하는 연구자/선생의 원칙을 고수한다면? 수가 적더라도 충분히 준비된 논문만 발표하고, 불필요한 사업을 따내지 않으며, 양질의 소규모 수업을 더 많이 개설한다면?
아마 그는 동료들에게 ‘답답한 사람,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 민폐 끼치는 사람’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다. 끊임없이 성과를 입증하고 더 높은 직위로 승진하는 것만이 유일한 존재증명 방식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라면 말이다. 떠나는 사람의 결단은 찬사의 대상이지만, 남아서 “하지 않는 편을 택하”(허먼 멜빌, <필경사바틀비>)는 존재는 미움의 대상이다.
김혜진 소설 <9번의 일>은 한 남자가, ‘물건 살 사람이 전혀 없는 허허벌판으로 발령돼’ 영업실적을 추궁당하며, 퇴사를 종용하는 직장에서 버티는 이야기다. 당연히 수치심과 모멸감을 견디는 시간이다. 지인들은 당장 직장을 그만두라고 성화다. 소설의 딱 절반까지만 그렇다. 놀랍게도 나머지 절반에서 그는, 송전탑을 짓기 위해 그곳의 유일한 인구인 노인들의 반대를 폭력으로 제압하는 ‘악마’의 모습이다. 그런 직장을 다니면서까지 그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이 무엇인지 아무도 묻지 않게 된 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