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행사에서 목격한 일이다. 행사를 주관한 단체의 대표가 연단에 올라 기념사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그때 단체 관계자가 급히 대표의 이름이 적힌 명패를 들고 가서 연단 위의 강연대 위에 놓으려 했다. 대표는 미소를 지으며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때 또 다른 단체의 대표가 이 장면을 보고 호쾌하게 말했다. “의전 참 잘하네!”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의전이라. 상사 앞에 명패를 놓는 것도 의전이라고 부를 수 있나? 그런데 의전의 사전적인 뜻이 뭐지?’ 의전의 뜻을 찾아보니 격식을 차린 행사라고 한다. 의전은 특히 “명사나 귀빈에 대한 예우”를 수행하는 격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의전과 특혜의 차이는 무엇인가? 왜 의전은 무대 앞에서 이루어지고 특혜는 무대 뒤에서 이루어지는가?
의전은 특정 개인들에 대한 극진한 접대가 아니다. 의전은 형식과 절차를 갖춰 그 특정 개인들이 대표하는 공동체에 존중을 표하는 것이다. 만약 한 나라의 수장이 다른 나라를 방문했을 때 의전의 없거나 부적절하게 이루어진다면 국민들은 “우리를 뭘로 보는 거냐”며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의전의 공동체적 의미는 퇴색되고 있다. 잘 알려진 의전의 예는 기관의 간부들에게 관용차를 제공하는 것이다. 관용차가 의전이 되기 위해서는 그 용도가 타 기관이나 외부 행사 방문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관용차는 간부의 출퇴근에 사용된다.
언제부턴가 의전은 특정인들을 위해 편의물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극진한 대접을 뜻하게 됐다. 누군가 말했다. “왜 사람들이 기관장이 한번 되면 그때부터 계속 기관장을 하고 싶어 하는 줄 아는가? 바로 의전 때문이다. 그 어마어마한 호사에 중독되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의전의 의미가 전도되고 그 전도된 의미가 고착되면서 기관의 고위 간부들은 언제 어디서건 자신에 대한 극진한 대접을 원하게 된다. 그리고 그 대접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불쾌와 분노를 표한다. “우리를 뭘로 보는 거냐”가 “나를 뭘로 보는 거냐”가 되는 것이다.
모든 행사는 고위 간부들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고위 간부가 참석한다면 (적어도 인사말을 하고 떠나기 전까지) 조직의 구성원들의 다수가 (심지어 어떤 행사인지도 모르면서) 동원되어 행사 자리를 채우기도 한다. 고위 간부가 뒤늦게 등장하자 소개와 축사를 위해, 이미 시작된 행사가 잠시 중단되는 놀라운 사태를 목격한 적도 있다. 내가 굳이 왜 저래야 하냐고 투덜대자 참석자가 말했다. “이해하세요. 저 사람이 예산권을 쥐고 있잖아요.”
공동체 구성원들과 그들의 활동이 특정 개인들의 의전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그들이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공동체의 운명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권력가들은 권력에 도취된 것인가, 아니면 의전에 도취된 것인가? 답이 무엇이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 공동체의 운명은 그들의 자기도취로 인해 이미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