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시맨>에는 로버트 드니로와 알 파치노의 근래 25년간 최고 연기가 있다. 그리고 9년 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조 페시가 있다. 러셀 버팔리노(조 페시)는 트럭 기사 프랭크(로버트 드니로)의 자질을 알아보고 범죄조직에 스카우트하고 트럭 노조위원장 지미 호파(알 파치노)에게 소개한다. 말하자면 러셀은 프랭크의 생에 흘러 들어간 죄의 근원임에도 시종 침착하고 평정하다. <좋은 친구들>(1990), <나홀로 집에>(1990), <리쎌 웨폰4>(1998) 등에서 조 페시는 이탈리아계 다혈질 갱이거나 작고 말이 빠른 우스꽝스러운 사내였다. 타입캐스팅을 불평하곤 했던 그는, 드니로가 끈질기게 설득해 <아이리시맨>에 끌어낼 때까지 절반의 은퇴 상태였다. 냉혹한 브레인인 러셀이 프랭크의 어린 딸 페기의 호의를 사지 못해 상심하는 볼링장 장면은, 지금까지 조 페시가 만들어낸 웃음과 전혀 다른 부류의 웃음을 짓게 한다. 이제 아무도 조 페시를 미묘한 연기와 무관한 배우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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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남성과 성평등에 관해 대화해본 여성이라면 “그건 네 생각이고”라는 철벽에 부딪힌 적이 있을 것이다. 주로 이어서 “우리 엄마는, 누나는, 선배는…”으로 시작되는 남자보다 대우받고 만족스런 생활을 하는 주변 사례가 열거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일인분의 경험치와 ‘내 생각’을 넘어서는 통계다. 물론 당신의 동료가 구제불능이라면, 통계나 수치를 언급하는 순간 당신을 남녀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지하 조직에 세뇌된 쌈닭으로 여기고 귀를 닫을 테지만. 지나 데이비스도 비슷한 답답증에 가슴을 친 여자 중 한명이었다. 할리우드를 움직이려면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깨달은 이 배우는 2004년 지나 데이비스 연구소를 설립하고, 영화산업 내 고용 불평등 및 할리우드가 생산하는 영화/드라마 내에서 젠더 재현 방식이 왜곡돼 있음을 수치로 입증하기 시작했다. 리서치뿐 아니라 수십년치 영화를 빠르게 스캔해 대사가 주어진 캐릭터의 성별을 파악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이 뒤따랐다. 다큐멘터리 <우먼 인 할리우드>는 지나 데이비스 연구소 활동을 중심으로, 여성 영화인들의 투쟁과 <겨울왕국>(2013), <히든 피겨스>(2016) 같은 개별 히트작이 나올 때마다 임박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막상 도래하지 않는 할리우드의 시스템 변화에 대해 진술한다.
<우먼 인 할리우드>는 수첩을 들고 VOD를 간간이 일시정지해가며 보고 싶어지는 영화다. 2017년 북미 흥행 상위 100편 영화 가운데 여성이 제1주인공(보도자료, 크레딧에 제일 먼저 이름이 올라간 배우 기준)인 작품은 38.1%에 이르렀다. 그러나 같은 영화들 속에서 남성 주연은 여성 주연보다 화면에 두배 더 노출됐다. 1949년부터 1979년까지 여성 영화인에게 배정된 일감은 전체의 0.5%에 불과했다. 능력만으로 경쟁한 결과가 아니다. 고용은 남성이 주도하는 에이전시와 제작사와 직능조합 사이에 오가는 후보자 명단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채널별 성불평등 지수 통계에서 꼴찌를 한 <FX채널>이 대담하게 남성의 비중을 49%로 낮추자 (대표의 인터뷰에 의하면) 작품의 질이 상승해 2018년 에미상 후보에 50명을 올렸다. 언론도 다르지 않다. 영화 평점 사이트 로튼 토마토에 등록된 평론가 77.8%는 남성이다. 가장 큰 위기감을 자아내는 대목은 성역할 개념을 형성하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의 편향이다. 위에 언급된 소프트웨어로 1990년부터 2005년까지 전체 관람가 등급 영상물을 스캔한 결과 흥행 상위 101편에서 대사를 가진 캐릭터의 72%가 남성이었고 내레이터의 80%가 남자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에서도 여자 캐릭터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노출이 많은 의상을 입는 것으로 관찰됐다. 픽사의 걸작인 <니모를 찾아서>(2006) 역시 매우 단순한 심급을 통과하지 못한다. 니모 부자가 사는 바닷속 해양생물의 대다수가 서사적 필요성과 무관하게 남성으로 설정돼 있다. 결과는 예측 가능하다. 5살 소녀들은 극중 그룹 중에 딱 한명인 예쁜 여자 캐릭터를 보면서 대부분의 활동은 남자들의 몫이고 여자의 중요성은 남자를 반하게 하고 그들의 임무 수행에 동기를 제공하거나 보상을 주는 데에 있다고 내면화하게 된다. <우먼 인 할리우드>에 언급되지 않은 통계 중에 2년 전 연말결산을 준비하던 내게 놀라움을 준 데이터가 있다. 할리우드 대표 에이전시 CAA에 속한 시프트7의 조사에 의하면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북미 흥행 상위 영화 350편 가운데 여성이 제1주인공을 맡은 영화는 105편으로 1/3 이하였으나, 동급 예산 영화끼리 비교한 결과 제작비 대비 수익은 여성 주연작이 남성 주도 영화보다 높았다. 또한 2012년 이후 2017년까지 1억달러 이상을 번 최고 히트작 중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영화는 한편도 없었다. 마지막 명제는 벡델 테스트가 좋은 영화, 심지어 가장 훌륭한 여성영화를 가르는 심급이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그래비티>는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아메리칸 허슬>에는 에이미 애덤스와 제니퍼 로렌스가 남자 이외의 주제로 대화하는 신이 딱 하나 있어 테스트를 통과하는데 이 장면의 화제는 매니큐어였다). 중요한 것은, 할리우드가 일정 규모를 넘어서는 메가 히트작을 내려면, 최소한의 성인지 감수성을 장착해야 한다는 세태 변화다. 카메라 앞 여성 서사가 약진하는 반면 카메라 뒤의 변화는 한참 더디다. 2018년 북미 흥행 상위 250편의 감독 중 92%는 여전히 남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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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인 할리우드>는 할리우드의 성차별이 초창기부터 있던 ‘자연의 섭리’가 아님을 지적한다. 초기 할리우드 3대 감독의 한 명이 여성인 로이스 웨버였고 작가의 대부분은 성평등 사상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러나 유성영화가 도래하고 외부자본이 할리우드에 들어오면서 산업화 과정이 진행됐고, 남성이 결정권을 지닌 외부자본과 남성이 지배적인 노동조합이 고용을 통제하면서 여성들은 지워지고 밀려났다. 오스카 역사상 지금까지 감독상 후보에 오른 여성은 5명이며 수상자는 캐스린 비글로가 유일하다. 여기서 반드시 등장하는 반론이 “여자는 감독이나 팀장급 스탭을 하기에는 현장 장악력이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한국영화촬영감독조합(CGK) 소속 여성 촬영감독들은 내게 들려주었다. “제작자나 감독을 만나러 가면 일단 핸드헬드 촬영할 수 있냐고 체력을 묻곤 했다. 그런데 장비가 발전하자 여성의 현장 장악력을 주로 의심한다.” 그러나 영화 현장이 어떤 식으로 관리돼야 한다는 인식 역시 무수한 남성 감독과 팀장들이 만들어놓은 사례의 총합일 뿐이다. <우먼 인 할리우드>에서 <FX채널> 대표는 장담한다. “여성 감독과 스탭과 배우를 고용하라. 재능 있는 인력이 정말 많다.” 다른 남성 관계자는 역차별을 불평하는 남성 동료에게 일침을 가한다. “성별을 고려하면 실력대로 안 뽑았다고 비난하는데, 현실적으로는 성별을 고려하지 않고 남성만 뽑는 것이야말로 실력에 눈감은 고용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남자에게 “네 딸이 그렇다고 생각해봐”라고 구차하게 주문할 필요도 없다. 딸이 있건 없건 성평등과 여성 능력의 계발은 모두의 세상과 예술에 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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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비밀은 없다>(2015)와 <미성년>(2018)에 이어 <윤희에게>(2019)의 딸도, 엄마의 엄마가 되고자 한다. 서울로 대학 진학을 앞둔 새봄(김소혜)은 엄마 윤희(김희애)의 옛 친구가 홋카이도에서 보낸 편지를 보고 비밀의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소녀는 용의주도하다. 먼저 이혼한 아빠에게 남은 가능성이 없나 확인하고 우울증으로 예민한 상태인 엄마를 조심스레 여행에 청한다. 엄마만 즐거우란 법 없다. 새봄은 야무지게 남자친구도 계획에 끌어들인다. <윤희에게>는 윤희와 새봄 모녀가 여행자의 자리에 서고 낯선 풍경으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생기를 띤다. 대범하고 산뜻한 김소혜의 연기가 곳곳에 빛을 던지는 인상이다. 서로 몰래 담배로 한숨을 토해냈던 모녀는, 눈밭 위에서 라이터를 빌리고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예뻐한다. 자기가 용의주도한 줄만 알았던 조숙한 19살은, 엄마와 친구를 좀더 믿어도 된다는 사실을 선물처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