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이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영국에서 <캡틴 브리튼>으로 출발한 앨런 무어는 <마블맨>(미국명 <미라클 맨>)에서 슈퍼 히어로를 재해석하기 시작한다. 니체의 초인사상을 만화에서 논하고, 자신의 힘에 도취되어 파시스트적인 폭력을 가하는 슈퍼 히어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앨런 무어는 <스웜프 싱>에서 늪의 괴물을 신화적, 환경문제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앨런 무어의 대표작 <워치맨>은 핵전쟁의 예감이 감돌던 8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동료의 죽음의 수수께끼를 찾아나선 왕년의 슈퍼 히어로들이 부닥치는 거대한 음모를 그린다.
‘20세기의 소설 베스트 200’에도 꼽힌 <워치맨>은 장르는 슈퍼 히어로물이지만 50년대풍의 SF스타일과 냉전에 대한 정치비평, 시각적으로는 상징주의와 대위법을 적절하게 구사하여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처럼 볼 때마다 새롭게 읽’히는 위대한 작품이다. 앨런 무어는 만화의 스토리를 쓰지만, 시각화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지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얼마 전 개봉했던 영화 <프롬 헬>의 원작을 그린 에디 캠벨은 “흑백이라도 그의 원작에서는 모든 색과 움직임이 정확하게 드러나 있다”고 말한다. 앨런 무어의 <프롬 헬>은 극단적인 폭력 묘사와 함께 역사, 신화, 철학, 건축, 계급, 미디어 등 인간의 모든 것이 농축되어 있는 걸작이다(아마도 그런 이유로 <프롬 헬>은 메이저 출판사가 아니라 자비출판 형태로 출간했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워치맨>의 성공으로 DC 코믹스는 좀더 실험적인 닐 게이먼의 <샌드맨>도 포함된 성인 취향의 ‘버티고’ 시리즈를 출범시킨다. 88년 배트맨의 탄생비화를 그린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이어 원>, 조커의 탄생비화를 그린 앨런 무어의 <킬링 조크>가 대성공을 거둔다. 또한 언더그라우드 만화계에서는 아트 스피겔만의 <쥐>가 퓰리처상을 수상하여, 마침내 코믹스가 예술로 인정받게 된다. 88년은 애니메이션 <아키라>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비롯하여 많은 일본 만화가 미국 시장에 보급된 해이기도 하다.
주목할 사실은 88년은 팀 버튼의 <배트맨>이 나온 해이기도 하다는 점. 부모의 살인범에 대한 증오심에 사로잡힌 채, ‘범죄자 사냥’의 정당성을 찾으려 방황하는 배트맨. 자신의 범죄를, 현실을 초월한 예술로 완성시키려는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범죄자 조커. 극단적인 빛과 그림자가 지배하는 고담시의 음울한 풍경 등 팀 버튼의 <배트맨>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프랭크 밀러와 앨런 무어의 ‘그래픽 노블’이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권선징악의 배트맨과 달랐던 팀 버튼의 <배트맨>은 시대의 변화와 86년의 만화 혁명이 가져온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만화 원작이 없지만, 너무나도 만화다웠던 샘 레이미의 <다크맨>(1989)에서 복수심과 광기에 자주 이성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다크맨의 캐릭터 역시 만화계의 거센 흐름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었다.
미국의 코믹스는 90년대에도 끊임없는 혁신을 거듭한다. 90년대 DC 코믹스는 타임워너 그룹과 손잡고 자신의 캐릭터를 스크린과 TV에서 활약하게 만들었고, 여전히 만화업계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92년에는 토드 맥퍼레인, 짐 리 등이 작가가 창조한 히어로의 권리를 만화사가 갖는 것에 반발하여, 작가가 저작권을 소유하는 새로운 회사 이미지 코믹스를 설립한다. <스폰> <와일드 캐츠> <사이버 포스> 등 화려한 그림과 격렬한 액션장면으로 태풍의 눈이 되지만 오랫동안 세력을 유지하지는 못했다. 90년대의 코믹스는 더욱 깊어지고, 더욱 넓어지고 있다.
15년 만에 발표된 <다크 나이트 리턴즈>의 속편인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다크 나이트 스트라이크 어게인(DK2)>은 최대의 화제작이다. 언제나 정치적인 문제를 전면에 깔았던 프랭크 밀러는 신작에서도 여전히 선동적이다. ‘미국은 이 힘으로 모든 적을 쓸어버릴 것이다’, ‘우리는 평화와 풍요에 사로잡힌 노예다’라며 TV로 대중을 선동하는 대통령의 실체는 버추얼 리얼리티. 모든 것을 조종하는 인물은 악당 렉스 루서다. 배트맨은 민중을 선동하여 루서가 좌지우지하는 정부에 대항하는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편집자인 밥 시렉은 “배트맨은 사실 테러리스트다. 초고층 빌딩의 위에 있는 루서의 기지를 향하여 배트카를 돌진하고, 동굴에 살고 있다. 그건 우연의 일치다. 이미 테러 전에 묘사된 상황이고. 위대한 코믹은 현실을 예언할 수 있다. 는 리얼한 누아르였던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 비하여 판타지적인 요소가 더 강해진 작품”이라고 평한다.
애국주의는 가라, 진정한 9.11의 교훈을 찾아서
현실을 예언한 것은 만이 아니다. DC 코믹스에서 일하는 언더그라운드 출신의 작가 더그 모엔치는 CIA의 음모를 그린 <배트맨 더 아우트로>의 작가다. 자신은 “반권위주의를 외치던 히피 세대”라고 주장하며, 9·11 이후의 애국주의 일색에 반발하여 DC 코믹스의 모든 작가들이 참여하여 9·11 테러를 그린 특별판 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의 이란 만화에서는 DC 코믹스의 히어로들이 어느 날 갑자기 초인적인 능력을 잃어버린다. 슈퍼 히어로들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포자기로 고주망태가 되거나 홈리스로 떨어진다. 그러다 화재현장을 지나던 슈퍼맨은 결사적으로 구출작업을 하던 소방사를 본다. 그리고 ‘초능력이 없이도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다’라고 자각하게 된다. 더그 모엔치는 ‘이것이 진정한 9·11의 교훈’이라고 본다.
DC 코믹스의 사장 폴 레비츠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슈퍼맨을 창조한 것은 유대계 이민이었다. 고향을 상실한 슈퍼맨은 그를 받아준 미국의 자유로운 정신에 감동되어,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싸운다. 테러에의 분노가 외국이나 국내의 다른 소수민족에 대한 적의로 나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작지만 코믹스도 그런 노력을 할 것이다.” 황당무계한 슈퍼 히어로에게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리얼 월드' 시리즈에는 자신의 초능력을 이용하여 S마크를 머천다이징 상품으로 팔아 백만장자가 되는 슈퍼맨이나, 가슴에 새겨진 S자 문신 때문에 감옥으로 가고 그곳의 보스가 되는 50년대의 슈퍼맨 이야기도 있다.
슈퍼 히어로에게 현실성을 부여하는 것 이외에도, 미국의 코믹스는 다양하게 성장하고 있다. <매트릭스>에서 미술을 담당한 제프 다로는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작가다. 프랭크 밀러의 스토리로, 미국에서 발표한 <하드보일드>는 <블레이드 러너>에서 영향을 받은 음산하고 기계적인 미래의 풍경과, 프랭크 밀러 특유의 폭력적인 이야기를 접목한다. 프랭크 밀러와 함께 일본 만화의 오마주로 발표한 <빅 가이 앤 러스티 더 보이 로봇>은 거대 로봇 빅 가이와 아톰을 연상시키는 러스티가 도쿄를 습격한 대괴수를 퇴치하는 내용이다. ‘캐릭터와 메카는 아르데코풍, 로봇과 우주선은 뫼비우스풍’으로 전세계의 다양한 것들을 한데 뒤섞어 독특한 개성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빅 가이 앤 러스티 더 보이 로봇>은 2000년 폭스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최고 인기 작가 중 하나인 알렉스 로스는 94년 판타스틱 포나 스파이더맨 같은 마블 코믹스의 히어로들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이야기의 <마블즈>로 인기를 얻었다. 로스는 리얼리즘을 추구하기 위하여 직접 모델에게 슈퍼 히어로 의상을 입혀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작업하고 다시 그것을 촬영한다.
DC로 옮긴 뒤 발표한 <킹덤 컴>으로 톱 아티스트의 반열에 오른 로스는 <스파이더맨>을 비롯한 많은 영화에 컨셉 아트를 제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짐 루거 원작의 3부작 <어스 X> <유니버스 X> <파라다이스 X>를 제작하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코믹스를 보는 연령층은 꽤 높은 편이고, 비평의 눈이 엄격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그래서 마블 코믹스는 최근 50년대에 만들어진 자주윤리규제위원회를 탈퇴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독자가 초등학생이던 시대의 유물이다. 그림을 그리는 손에 제약을 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국 코믹스의 시장은 일본보다도 작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적인 발상이다”라는 이유다.
현실에 기반을 둔 기발한 판타지
요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가 많아진 것은 이러한 이유다. 코믹스의 ‘리얼리티’가 높아졌다는 것. 만화의 소비층이 아이들만이 아니라 성인까지 포함된다는 것. 만화가 더이상 황당무계한 공상이 아니라, 현실에 기반을 둔 기발한 판타지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공유된 것이다. 게다가 그림으로 그려진 만화는, 영화의 시각적인 완성도를 높이는 데 큰 공헌을 한다. <프롬 헬>의 각색자인 라파엘 이글레시아스는 “소설보다 만화 원작이 기획을 통과하기 쉽다. 문장과 달리 시각적으로 일목요연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스토리 작가이기도 했던 워쇼스키 형제는 제프 다로가 그린 스토리보드로 제작자를 설득하여 <매트릭스>를 만들 수 있었다. 또한 만화 원작영화가 많아진 가장 큰 이유 하나는, 86년의 만화 혁명을 직접 체험하면서 감화감동한 세대가 지금 영화계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스스톰> <식스 센스>나 <레퀴엠> 같은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들이 모두 만화의 자식이었고, 자기가 심취했던 만화를 영상으로 재현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보았던 만화는 가장 실험적이고, 가장 격렬하고 선동적인 내용을 담았던 작품들이었다. 그런 만화를 보면서 자라난 그들이, 충격적이고 스타일리시한 영화를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80년대 이후 블록버스터의 늪에 빠져 70년대의 혈기방탕함을 잃어버린 할리우드영화와 달리, 미국의 만화는 쉬지 않고 싸워왔다. 지금 만화가 영화의 세계로 침투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만화의 자식들인, ‘슈퍼 히어로’가 할리우드를 정복할 날이 멀지 않은 것이다. 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
▶ <스파이더 맨>, 혹은 음울한 만화영웅들의 신세기 영화세상 점령기 (1)▶ <스파이더 맨>, 혹은 음울한 만화영웅들의 신세기 영화세상 점령기 (2)
▶ 1986년까지, 미국 슈퍼 히어로 만화 소사
▶ <스파이더맨> 감독 샘 레이미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