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전부터 해외 영화제 등에서 화제가 됐던 김보라 감독의 데뷔작 <벌새>가 오랜만에 한국 독립영화 극장가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쉽지 않았던 제작 환경 속에서 쉽게 타협하지 않고 고민하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한 모습이 영화 곳곳에 묻어난다. <벌새>는 1994년이라는 배경을 지닌 영화이지만 쉽게 말해 상업영화의 화법을 지닌 영화가 아니다. 요즘 관객에게도 다소 낯선 리듬과 시선을 지닌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김보라 감독을 비롯한 <벌새> 제작진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고민과 각오를 거쳐 완성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배우 캐스팅 과정에서부터 마지막 후반작업에 이르기까지 김보라 감독과 한마음 한뜻이 되어 영화의 완성을 함께했던 스탭들이 들려주는 <벌새> 제작기를 읽고나면, 영화 요소요소에 더욱더 큰 애정이 생겨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나 그리고 둘>을 레퍼런스 삼아
“잠시 잊고 있었던 영화적인 언어에 다시 한번 반할 기회가 될 것 같았다.” 강국현 촬영감독은 김보라 감독으로부터 <벌새>의 촬영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고 이렇게 생각했다. 단편영화 <리코더시험>(2011)을 만든 이후 첫 장편 데뷔를 준비하던 김보라 감독은 2013년에 초고를 완성한 후 몇 년간 수정에 수정을 거치면서 시대의 공기를 담는 방식, 1994년이란 배경 속 은희(박지후)의 모습을 담는 방식 등을 고민할 때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 (2000)을 우선 염두에 뒀다. 그는 “에드워드 양 감독 영화의 카메라 시선, 반복적으로 쓰이는 어떤 각도 같은 것들이 그저 무심하게 펼쳐놓고 찍은 관조적인 숏이 아니다. 나름의 분명한 시선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촬영을 해보자”고 의지를 모았다고 전한다. 그러한 방향은 기획 단계 때부터 김보라 감독과 함께했던 조수아 프로듀서가 생각했던 “은희라는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는 영화의 방향”과도 맞닿은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이야기의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서, 인물의 정서에 맞는 배경,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미술이 영화에 스며들도록” 했던 김근아 미술감독의 작업이 영화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벌새>라는 거대한 우주의 창조에 물론 음악이 빠질 수 없었다. 마티야 스트르니자 음악감독은 “<벌새>의 음악을 통해 외로움과 좌절, 사랑과 삶에 대한 감사, 긍정적 태도와 같은 상충하는 감정들, 그것들의 상호작용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한다.
1994년, 은희의 아파트 만들기
<벌새>의 은희가 사는 곳은 강남의 한 아파트 단지다. 제작진 모두 은희의 집을 결정하기 위해 많은 헌팅을 다녔으며 대치동 은마아파트로 결정됐다. 미술 파트에 있어서 제작비 여건상 많은 부분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지만 김근아 미술감독은 “믿고 맡겨달라”는 한마디와 함께 한달간 그곳에서 팀원들과 숙식하며 세트 작업을 했다. 현관문을 시작으로 장판과 벽지, 실내등과 문 손잡이까지 교체하며 현대식으로 리모델링된 구조를 시대에 맞게 변경했다. 또한 미술팀은 소파와 장식장, 작은 유리잔 하나부터 오래된 전등과 스텐드까지, 여러 소도구들을 온갖 곳으로부터 공수해왔다. “식탁보와 식탁의자 커버는 물론 각종 패브릭 소품들은 당시 어머니들 사이에서 뜨개 문화가 많이 형성되어 있던 터라 실제로 어머니께 부탁해 뜨개질 소품 제작을 부탁드려 준비하기도 했다.”(김근아 미술감독) 은희 방의 문구류나 소품 등은 김근아 미술감독과 김보라 감독이 실제 유년 시절에 사용했던 것들로 채웠다. “공간이 좁아 모든 것이 가까이에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공간 구조였기 때문에” 고증을 철저히 하려 애쓸 수밖에 없었다고. “세팅을 마치고 스탭들이 ‘원래 있었던 집 같다’고 해줘서 뭉클해질 정도로 보람을 느꼈다.” (김근아 미술감독)
익숙한 가족의 공간
영화 전체의 톤 앤드 매너를 결정하는 데는 강국현 촬영감독의 카메라의 위치 선택 내지는 정적인 촬영의 매력이 큰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해서 그는 이 영화가 “다양한 리버스숏이 오가는 영화도 아니었고 숏 바이 숏을 통해서 긴장감이나 다양한 리듬을 만드는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해당 숏이 한 단어나 서술어 정도로만 기능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관객은 캐릭터와 카메라 사이가 굉장히 가깝다는 인상도 받게 될 텐데 이는 “배경 공간이 좁다”는 현실적 이유가 있었고, “공간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은희의 집을 보여줄 때 강국현 촬영감독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카메라 위치는 익숙한 시선이었다. “식탁을 옮긴다든가 여러 장비를 활용해서 다채로운 앵글이나 시선을 제공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실제로 우리가 살면서 각자의 집에서 보게 되는 익숙한 시선을 담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다.”(강국현 촬영감독)
빛과 그림자
박지후, 김새벽 배우의 캐스팅은 거의 2년 넘게 진행됐다. 조수아 프로듀서는 “김보라 감독과 함께 그 나이 또래 배우는 거의 다 오디션 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박지후 배우 오디션 때가 인상적이었다. 그만큼 열정적으로 임하는 배우가 없었다. 카리스마도 있었고. 김새벽 배우는 어느 날 김보라 감독이 추천하자마자 자연스러운 매력이 잘 어울릴 것이라 예상했다”고(맨 위).
김근아 미술감독을 비롯해 많은 스탭들이 촬영장에서 박지후 배우를 은희라고 불렀다고. “아직까지도 은희라고 부르는 것이 더 익숙한 박지후 배우는 어른들도 힘든 현장에서 단 한번도 힘들어하거나 투정부리지 않고 오직 ‘은희’ 그 자체에 집중하며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김근아 미술감독)(위)
강국현 촬영감독은 영화의 계절 배경이 봄에서 가을까지이고 핵심은 여름이었기 때문에 자연이 어우러진 모습을 담으려고 했다. 단지 내에 수풀이 우거지고 나무 사이로 그림자가 드리워진 모습을 많이 담으려고 했다. 빛의 일렁임은 “어떨 때는 설레게 보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모호함으로 닿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햇빛이 변화하는 시기에 촬영할 때는 정보를 찍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광인 햇빛의 변화에 기분이 묘해지기도 하는, 묘하게 햇빛 아래에서 과거를 추억하게 되는 순간의 느낌을 담고자 했던 것”이 그의 의도다. 그가 선택한 카메라인 레드 에픽 드래곤과 스미크론 렌즈들은 주어진 촬영 예산에서 그가 내릴 수 있었던 최선의 장비 선택이었다. 반대로 빛을 통해 불안함을 표현하려 했던 장면도 있었다. 은희가 수술을 마치고 병원에서 퇴원하던 순간, 역광인 상황에서 그녀가 병실을 등지고 카메라 밖으로 휙 사라지는데 이는 “시나리오에서 이미 어느 정도 의도가 담겨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한문학원에서 영지 선생님(김새벽)의 거취를 두고 원장 선생님에게 은희가 따질 때도 그렇다. 은희는 카메라를 등지고 서 있는데 카메라는 포커스가 나간 상태로 어디에도 집중하지 않는다.
음악
은희와 지숙(박서윤)이 클럽에서 춤을 추며 작은 일탈을 벌이는 장면은 홍대 명월관에서 촬영했다. 그리고 은희가 유리와 삐삐 번호를 교환하던 골목은 실제 명월관 건물 옆 골목이다. 이 장면에서 강국현 촬영감독은 은희의 얼굴을 약간 사선에서 내려다보듯 찍는다. 그에 따르면 제3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관찰하는 클로즈업”이라고. “나는 배우의 얼굴 각도도 중요하지만 인물이 화면 밖의 어디를 바라보는가를 더 예민하게 신경 쓴다. 관객 역시 인물의 시선을 중요하게 본다. 의도적으로 카메라를 높이면 인물은 아래쪽을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그 순간의 본능적인 촬영이다.”(강국현 촬영감독)
<벌새>의 사운드트랙은 마티야 스트르니자 음악감독의 개인 사운드 클라우드 계정에서 감상할 수 있다. 그는 “영화의 특정 장면에 포커스를 맞추기보다는 전반적인 영화의 흐름과 전개를 두루 생각”하면서 “드러나지 않는 감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조수아 프로듀서도 김보라 감독과 상의했던 <벌새>의 음악에 대해 “장르적으로는 일렉트로닉을 원했다. 올드하지 않으면서 현대적인, 그러면서도 현실에서 벗어난 음악을 원했다”고 말했다. 마티야 스트르니자 음악감독의 음악은 이 영화의 어떤 리듬이나 정서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영화음악을 작업하면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영화에서 음악이 시작되는 타이밍을 결정하는 일이다. 가족들의 식사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은희가 오빠한테 맞았다고 이야기를 해도 부모님이 은희를 공평하게 대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장면에서 음악은 은희와 은희의 언니 사이의 둘만 아는 미묘한 아이 콘택트가 오간 직후, 그 억눌린 눈빛을 주고받은 직후에 시작된다. 우리는 이 무력함의 정서를 다음 장면까지 가지고 갔다.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이 무력함의 대척점에 있는, 담배 피우는 영지 선생님을 보게 된다. 영지 선생님은 사회에 존재하는 엄격한 규칙과 여성의 억눌림에 대항하는 존재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방법을 통해 우리는 특정 장면들을 서로 연결하고, 더 나아가 영화의 내러티브를 좀더 자연스럽게 엮을 수 있었다.”(마티야 스트르니자 음악감독)
시간
조수아 프로듀서가 편집 과정에서 가장 고민했던 점 중 하나는 “시간의 문제”였다. “무엇을 얼마나 오랫동안 보여줄 것인가, 그리고 덜 보여줌으로 인해 어떻게 더 불안함을 일으킬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 강국현 촬영감독의 촬영에서부터 시작된 고민이기도 하다. “촬영하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 카메라로 1분을 찍는다는 것은, 그 시간을 그냥 찍는 거다. 그런데 정적인 그 순간에 미세한 변화가 생긴다면, 예를 들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에서처럼 공사장 사운드나 목공소리가 들려온다면 그런 미세한 변화로 인해 관객이 받아들이는시간의 변화가 확 바뀐다. 밤에 은희가 영지 선생님을 만나고 집으로 걸어오는 장면도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지만 나무 그림자에 가려서 은희의 표정이 보였다 안 보였다를 반복한다. 나무 그림자의 변화나 바람 소리 등으로 인해 관객이 체감하는 시간의 변화, 시간성이 달라진다.”(강국현 촬영감독)
삭제된 장면
김보라 감독과 함께 편집에 참여한 조수아 프로듀서는 3시간 30분에 달하는 편집본 중에서 “은희의 감정선을 흐트러뜨리는 부분 위주로” 러닝타임을 줄여야 했다. 그것은 결국 “어떤 순간에 은희를, 은희의 세상을 보여줄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래서 안타깝게 덜어내야 했던 장면이 많은데 조수아 프로듀서가 꼽은 가장 아쉬운 장면은 은희와 수희의 장면이다. “은희와 수희가 싸우는 장면이 있었다. 은희가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한 다음 수희의 학교로 간다. 그곳에서 수희와 같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버스에서 내려 신호등을 건너는 장면이 있다. 은희가 먼저 뛰어가자 수희가 화를 내는 장면인데 수희의 불안함을 담은 장면이었다.” 그리고 또 한 장면. “은희가 지숙과 같이 노래방에 가는 장면도 있었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데 스토리상으로는 중요하지 않지만 매우 시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엔딩
시나리오와 완성된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엔딩이다. 아르테 출판사에서 출간된 시나리오집 <벌새>에 따르면, 시나리오상의 엔딩은 수학여행에 들뜬 아이들이 관광버스에 올라 출석 체크를 하며 끝맺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출석 체크를 하면서 “모두 다 있지?”라고 물으면 영지 선생님의 내레이션인 “(중략) 모두 다 이야기해줄게”라는 말이 들려오고 은희가 자리에서 마치 그에 답하듯 “네, 모두 다 있어요”라고 답한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바뀐 엔딩에는 강국현 촬영감독과 B캠 감독이 현장에서 혹시나 싶어 찍어놓은 소스 가운데 고속촬영으로 은희의 클로즈업을 찍은 숏이 쓰였다. 김보라 감독과 조수아 프로듀서가 편집 과정에서 이 숏을 보고는 수정에 수정을 거쳐 결정한 것이라고. 조수아 프로듀서는 이에 대해서 “오랫동안 아이를 바라봄으로써 뭔가 그 아이가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바뀐 엔딩에 마지막 힘을 실어주는 것은 음악이다. 마티야 스트르니자 음악감독이 만든 엔딩곡 <Everyone Is Here>에서 그와 김보라 감독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영화의 마지막 음악에서는 매우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영화의 시작점이 느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