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란 미화되기도 쉽고 잊히기도 쉽다. 아니, 과거는 그대로 거기 있는데 사람이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 재현된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과거를 미화해 기억하기도 하고, 그것이 없었던 일인 양 잊어버리기도 한다. 유튜브에서 ‘탑골가요’라 불리는 90년대 ‘인기가요’의 무대들은 지금에야 웃긴 것으로 재해석되며, 당시에는 그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여기지지만 사실 이정현의 무대는 그때에도 진기한 것이 아니었나. 9월 <씨네21>의 책장에는 과거를 기억하거나 정리하는 사람들의 책을 모았다. 공선옥의 <은주의 영화>는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목소리로 시작된다. 아버지와 영화를 봤던 기억은 이내 아버지의 목소리 “(너희 엄마를 만난 건) 영화였어”로 이어진다. 마치 누군가의 이야기를 옆에서 엿듣는 것처럼 생생한 문장은 공선옥 소설의 특기다. 건축 에세이 <수리수리 집수리> 역시 건축 현장과 동네 사람들의 목소리를 옆에서 듣는 것처럼 실감나게 옮겨놨다. 건축가인 저자 김재관은 5채의 집을 수리하는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했는데 이것은 사실 건물의 기록이 아니라 사람의 기록이다. 집수리 때문에 시끄러워 살 수가 없다고 따지러 온 옆집 사람의 목소리, 일을 하며 자기 기준이 더 옳다 옥신각신하는 목수들의 목소리가 거기 있다.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10권 <폴리스>는 10년 전 사건의 담당 형사가 시체로 발견되며 문을 연다. 미제사건을 다시 기억하면서 해리 홀레만은 사건을 현재로 끌고와 다시 상상하고 탐문한다. 은희경의 <빛의 과거>는 40년 전 자신의 모습을 친구의 소설에서 맞이한 ‘나’의 이야기다. 친구가 그려낸 내 모습은 당연히 내가 기억하는 나와 차이가 있다. 친구 김희진의 소설 속에서 나뿐 아니라 1977년 함께 기숙사에 살았던 친구들, 그리고 내가 겪었던 사건은 모두 내 기억과 달리 재편되어 있다. 누구의 기억이 맞는지는 더이상 중요치 않게 된다. 그 시절 여대 기숙사에서 벌어진 일들, 80년대, 90년대를 지나 2017년으로 이어지는 삶의 편린들은 은희경이라는 소설가를 통해 이내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기억된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가을이야말로 책 읽기 좋은 계절이 아니던가(여름에도 이렇게 쓴 것 같다). 나를 그 시대, 그 사람들 옆으로 데려가는 좋은 책들과 짧은 가을을 흠뻑 즐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