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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나쁜 일이 닥쳐도 기쁜 일이 함께한다
이화정 2019-08-28

1초에 적게는 19번, 많게는 90번 날갯짓하는 새, 꿀벌보다 더 부지런하다고 알려진 몸집이 자그마한 새, 벌새. 1994년, 뉴스에서 김일성 사망소식이 나오고, 성수대교가 붕괴한 참상의 해를 지나쳐온 중학교 2학년 은희(박지후)의 모든 감각은 작은 벌새처럼 그렇게 열려 있다. 만날 다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하는 부모님의 사이가 이상하고, 민감한 수험생 오빠의 폭력이 버겁고, 집안의 골칫거리인 언니의 ‘비행’이 못마땅하다. 성가신 일로 가득한 집을 나서면, 그래도 단짝 친구와 남자친구, 은희를 좋아하는 후배가 있다. 문밖에 그렇게 은희를 설레게, 슬프게, 화나게 하는 관계들이 존재한다.

한문 학원에 새로 온 김영지 선생님(김새벽)은 이렇게 다양한 ‘징후’로 가득한 은희의 세계에 예고없이 등장한 ‘항해사’다. "나쁜 일이 닥쳐도 기쁜 일이 함께한다"고 알려주는 영지는 자신만의 감각으로 해결되지 않았던 은희의 질문에 조곤조곤 화답하는 존재다. ‘서울대만이 정답’이라며 다그치는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영지는 은희에게 세상을 살아갈 긍정의 법칙을 일깨워주는 마음의 벗이며, 은희는 그 에너지를 자양분으로 그해 여름을, 또 앞으로를 버텨나갈 것이다.

은희의 눈에 비친 1994년의 풍경. 그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마치 타임워프 안경을 끼고 보는 듯 생생하다. 만져질 것 같은 당시의 서울, 대한민국. 때로 무자비한 도심 속, 은희가 잠깐 응시하는 것들이 유독 오랜 잔상으로 남는다. 죽은 삼촌이 떠난 후 켜진 아파트 센서등, 불러도 대답 없이 허공을 바라보던 엄마의 옆얼굴, 조용히 노동가를 부르던 영지의 표정. 김보라 감독의 단편 <리코더시험>(2011)에서의, 같은 이름의 ‘은희’의 성장 서사이자 연출, 연기, 제작, 촬영, 음악, 미술 등의 요소들을 곱씹어 해부하고 싶어지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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