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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속상함
2002-05-02

신경숙의 이창

시인 유하가 두 번째 영화를 완성했다고 해서 시사회에 갔었다. 문인 시사회라고 했다. 나는 강남 지리에 완전 젬병이다. 십여년째 개포동에 살고 있는 큰오빠네 집을 이따금씩 방문하는데 아직도 매번 헤매고 있는 중이다. 십오년 전쯤 선릉역 근처에 있는 잡지사에 일년쯤 근무한 적이 있음에도 그러하다. 오히려 그 경력이 더 방해가 되는 것 같다. 그때는 거의 허허벌판에 빌딩이라고는 그 잡지사 건물이 오롯이 서 있었을 뿐이었는데 지금은 그 벌판을 꽉 메우며 빌딩들이 들어섰으니 그러잖아도 길눈이 어두운 내가 어찌하랴. 이번에도 다르지 않아 안국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신사역에서 내려 시사회장을 찾아가는데 이십여분은 족히 걸은 것 같다. 영화가 막 시작되려는 무렵에 시사회장에 들어서는데 시인 유하가 인사말을 하고 있었다. 시사회를 갖는 일이 시집을 돌리는 기분이라고 했다. 문인들을 상대로 한 시사회라 그랬을 것이다. 영화가 얼마쯤 진행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나도 자주 쿡쿡거리며 웃었다. 이따금 웃기지도 않는 대목에서 웃는 사람이 있었다. 저이는 왜 웃을까? 뭔가 숨겨놓은 유머가 있는데 나만 모르는 건가? 생각하느라 잠깐씩 화면을 놓치기도 했다. 그 의문은 곧 풀렸다. 연희로 분한 엄정화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문고판 <사라진느>를 펼쳐 읽고 있을 때 시인 소설가들은 모두들 웃었다. 그때 시인 유하 곁에 앉아 함께 자신이 출연한 장면을 보고 있던 엄정화가 대체 왜 웃는 거예요? 묻는 소리가 들렸다. 화면 속에서 자신은 그저 책을 읽고 있을 뿐인데 대체 저이들은 왜 웃는 것인가. 이런 경우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여러 번 반복되었다. 시사회장에 온 문인들은 대개는 시인 유하를 얼마쯤은 아는 사람들이다. 그의 시집을 한두권쯤 읽었을 것이고 그의 특성들 한두 가지쯤은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서로 맥락은 닿지 않지만 어떤 장면에서 혹은 어떤 대사에서 유하의 시집이나 개인 유하의 목소리나 취향이 감지될 때마다 웃게 되었던 것이다.

시인 유하가 만든 영화를 보는 일은 즐거웠다. 얼핏 보기엔 어울려 보이지 않는 엄정화, 감우성 커플은 의외로 사랑스럽고 조화로웠다. 이야기의 연결도 매끄러웠으며 마지막 마무리도 여운을 남겼다. 영화가 끝나고 뒷자리에 모여 앉았는데 우스개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얼마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시사회를 봤다가 이 정도면 뭐… 다들 안심한 듯한 속에서 나오는 잡담들. 그런데 감우성은 뭐가 불만이야? 연희 같은 여자가 있으면 너무 좋겠구먼. 방 얻어줘, 밥해줘, 잠도 자줘.…. 뭐가 불만이기에 먹지 말라는 라면을 억지로 먹고 젓가락 집어던지고 그러는 거야? 감독의 변: 원래 첩들은 징징대게 되어 있어요. 터지는 웃음. 또 누군가 그런다. <사라진느>는 왜 읽게 해? 당신 시집이나 읽게 하지. 약간 긴장하고 있는 것 같던 시인 유하가 그제야 기분 좋게 웃었다. 솔직히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죠. 그날 <천일마화>를 들고 나가기까지 했다구. 그런데 그렇게는 못하겠더먼. 요새 문학과지성사가 장사가 안 되는 것 같아서 좀 도움이 될까 하고 <사라진느>를 읽게 했지. 또 터지는 웃음. 그 틈을 비집고 누군가 불쑥 질문했다. 그런데 영문학 시간강사 몸이 그렇게 좋을 수 있어요. 리얼리티가 없는 거 아니야. 그래서 내가 우성이한테 몸 좀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내 말을 안 들어요. 상체가 나오는 장면만 나오면 풋샵을 한다니까. 또 터지는 웃음.

나는 시인 유하가 만든 영화가 잘되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너무 잘되어서 시인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싶은 마음도 공존한다. 그는 자신은 시인이라면서 그럴 일은 없다, 고 하지만 글쎄 앞날을 어찌 알겠는지. 소설가였던 이창동 선배를 보라. 나는 이창동 선배가 영화감독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 그가 <초록물고기>를 만들었을 때는 한번 만들었으니 소설로 돌아오겠지, 했다. 그런데 <박하사탕>을 보고 와서는 완전히 영화쪽에 뺐겼군, 기분 좋게 속상했다. 요새는 잡지를 무심코 넘기다가 완전히 감독의 얼굴이 되어 있는 그의 얼굴과 마주치면 깜짝 놀라기까지 한다. 아마 내가 글을 쓰는 동안 나도 모르게 시인 유하, 라고 꼬박꼬박 지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