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선언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는가. 혹은 과거 선언을 어떻게 현재로 끌어올 것인가. 율리안 로제펠트 감독의 <매니페스토>는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공산주의, 상황주의, 도그마95 등 예술, 정치, 사상에 관한 선언을 인용해 내레이션과 대사를 만들고, 이를 1인13역으로 분한 케이트 블란쳇이 잠시 머무는 13개의 세트 속에서 풀어낸 작품이다. 하나의 퍼포먼스 필름이자 그 자체로 상황주의적인 실천처럼 보인다. <매니페스토>는 애초에 설치미술 작품으로 만들어졌으며, 각각의 에피소드가 다중스크린에 영사되는 형태로 전시된 바 있다. 케이트 블란쳇은 걸인, 중산층 가정의 어머니, 공장 노동자, 뉴스 앵커, 무용 디렉터, 로커, 교사 등을 연기한다. 그의 연기에 따라 선언의 말이 표출되는 방식 역시 달라진다. 뉴스 리포트, 수업, 추도사, 부르주아 식탁의 기도, 분노에 찬 읊조림 등으로 드러나며, 때로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의 형태로 들려온다. 익숙한 영화적 상황 속에 낯선 선언이 덧입혀지는 셈인데 이때 선언과 상황은 꼭 들어맞기보다는 어딘가 어긋나면서 관객의 상상을 자극하는 쪽이다. 케이트 블란쳇이 13명의 인물로 분하지만 결국에는 그 모두가 포함된 한명의 케이트 블란쳇으로 관객에게 인식되듯, 다양한 선언들이 말하는 바가 서로 충돌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된다. 이 덩어리를 정의하는 단어 중 하나는 ‘모순’이다. ‘현재의 모든 예술은 가짜다’라는 말과 충돌하듯 이어지는 ‘예술에는 진실이 필요하다’라는 말처럼, 이 작품이 진실을 보여주는 방식 역시 오직 거짓됨을 폭로할 때뿐이다. 진실과 거짓, 예술과 반예술, 의미와 무의미 등 온갖 대조적인 것들이 영화 내내 우글거린다. 형식 측면에서는 부감숏과 케이트 블란쳇의 얼굴 클로즈업숏의 대조가 두드러지는데, 이는 양극을 아우르는 선언들에 대한 형식적 대응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