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온의 <한 폭의 빛>은 도시와 숲, 꿈, 요람, 여자, 아이 등의 이미지와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서사. 숲에서 새가 길게 우는 소리는, 노래로 해석되는 대신 비명으로 들린다. “모두가 살아서 서로의 비명을 듣고 있다.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그건 유일한 안부가 된다.” 빛이 반짝일 때면 시간이 고여 있는 환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백수린의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는 어렵사리 둘째를 낳고 전업주부로 사는 여자의 이야기. 10여 개월을 오랜시간 아이들과 지내다가 외출해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옛 친구를 만나며 잊고 있던 시선, 시선이 일깨우는 욕망, 호기심을 새롭게 각성한다. “한순간이지만 엄마가 자신을 완벽히 잊을 수 있음을 알아”버린 이제 갓난아기인 둘째를 제외하면 아무도 변화를 모른다.
장희원의 <우리의 환대>는 아들이 살고 있는 호주의 퍼스를 방문하는 부부의 이야기다. 가족은 언제까지나 전과 같다고 생각하는 부모 세대와 그들과 분리된 주거공동생활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새로운 이들과 삶을 꾸려가는 아들의 모습이 펼쳐진다. “아내가 본능적으로, 이제 영원히 아들을 잃었음을” 깨닫는다.
그런 이유로 묶인 소설들은 아니라 해도, 어떤 것들이 전과는 영영 같아지지 않는 순간들을 포착하는 이야기들이라는 인상이 있다. 그것은 누구의 눈에나 띌 만한 사건으로 기록되지는 않지만 불가역적이며, 어쩌면 이들은 삶의 남은 시간 동안 이런 깨달음의 순간을 몇번이나 반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찰나를 인식하는 일의 고됨과 쾌감이 있다.
<소설 보다>는 문학과지성사가 ‘이 계절의 소설’을 선정한 뒤 계절마다 엮어 1년에 4권씩 출간하는 단행본 시리즈다. 선정된 작품은 문지문학상 후보가 된다.
거대한 체념
“그는 틀림없이 욕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어봤겠지? 불현듯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일찍 철이 든 척했지만 그녀의 삶은 그저 거대한 체념에 불과했음을.”(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