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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트> 유재명 - 무엇보다 입체적으로
송경원 사진 오계옥 2019-06-18

유재명 배우의 언어는 단단하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그의 이야기는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존중하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데 흔들림이 없다. 부산에서 ‘배관공’(배우, 관객 그리고 공간)이란 극단을 운영하며 연기에 매진해온 15년의 세월, 그는 스스로 무식할 정도로 괴물같이 살아왔다고 토로한다. “일상, 여행, 가족, 관계처럼 내게 줄 수 있는 선물 같은 시간을 주지 않고 모질게 살았다.” 서울에 와서 영상연기를 시작한 후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7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연기에 몰두해온 그에게 이번 영화는 어쩌면 좋은 전환점이 될 것 같다. 유재명 배우는 각자의 방식으로 살인마를 잡기 위해 대립하는 두 형사의 이야기를 그린 <비스트>에서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욕망을 지닌 강력반 팀장 민태 역을 맡아 특유의 흡인력 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정답이 없는 곳에서 끝내 정답을 찾아나가는 그의 연기는 이제 새로운 길로 접어들고 있다.

-근래 본 영화 중 가장 묵직한 정서를 담고 있다. 그야말로 어둡고 진하고 깊다.

=무겁지만 좋은? (웃음) 얼핏 익숙해 보이지만 색달랐다. 시나리오를 읽고 휘몰아치고 반전을 거듭한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예상보다 훨씬 깊고 묵직한 결과물이 나왔다. 대개 시나리오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편인데 이번 영화는 그게 명료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과는 다르다. 장르적으로 익숙한 것들을 따라가면서도 캐릭터의 농도가 다르다고 느꼈다. 특히 민태는 정말 안개 속에 가려진 인물처럼 다가왔다. 어쩌면 내가 민태라는 인물을 알아가고 싶어서 시작한 건지도 모르겠다.

-강력반의 2인자 민태는 원칙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욕망이 들끓는 복잡한 인물이다.

=감독님과 여러 차례 미팅을 하면서 나의 해석과 감독님의 구상이 묘하게 겹치는 부분을 만났다. 그 사이에서 뭔가 만들어 나가고 싶어 출연을 결심했다. 민태의 정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다. 단순히 성공이나 승진, 야망을 위해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다. 민태를 움직이는 욕망의 근원을 상상하는 게 중요했다. 민태의 결핍은 ‘민태’라는 것 외엔 다른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본래 나는 명확하게 그려지고 납득한 후에 연기를 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엔 불투명한 상태로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만큼 끌렸는데, 그게 이번 영화에서 배우 유재명의 욕망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머리로 이해되는 이유를 억지로 만들기보다는 민태 그 자체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힘들었지만 멋진 작업이었다.

-드라마 <비밀의 숲>의 창준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을 자주 맡는 것 같다. 마음을 억누르고 가면을 쓰는 역할들이라 표현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캐릭터의 입체화에 집착하는 편이다. 이야기는 직진할 수 있어도 캐릭터는 그럴 수 없다. 왜 이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지 근원을 역으로 추적하는 게 나의 기본적인 접근방식이다. 민태의 결핍에는 외로움이 있다고 생각했다. 민태는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 거기서 출발해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게 나의 몫이었다. 이성민 배우가 맡은 한수가 뜨거운 불꽃 아래 날카로운 이성의 칼날을 지닌 인물이라면 민태는 얼음처럼 차가운 외면 밑에 용암처럼 뜨거운 욕망이 흐르는 인물이다. 차갑다기보다는 착잡한 이미지.

-역할의 크기나 장르, 영화의 규모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영화에 출연해왔다. 드라마에선 큰 역할들을 맡아왔지만 영화에서 이 정도로 큰 비중을 담당한 건 그리 많지 않았다.

=주변에서 너무 다작을 하는 게 아니냐고 걱정하시는 분도 있다. 연극할 때부터 나는 부족한 배우라는 생각이 깊게 각인되어 있다. 그 시기엔 힘들었지만 그게 나의 무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누군가 이렇게 부족한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 자체가 여전히 감동이다. 느낌이 맞는 작품이 있으면 가리지 않으려 한다. 또 한 가지, 작품을 하면서 에너지를 얻는다. 새로운 작품을 만나고 연기하면서 재충전이 되는 기분이다. 물론 한때 잠깐 과부하가 오기도 했다. 최근엔 마라톤하는 감각으로 일과 생활 사이에 밸런스를 맞춰나가는 게 화두이자 숙제 중 하나다.

-언제 자기 안의 ‘비스트’가 있다고 느끼는지.

=늦게 드라마, 영화를 시작하면서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3, 4년 사이에 많은 변화들이 있었고 이번에 <씨네21> 첫 표지 촬영을 한 것처럼 매번 처음 겪는 일투성이다. (웃음) 존경하는, 닮고 싶은 이성민 선배와 함께 영화를 찍는다는 것도 내겐 비현실적인 일이다. 한편으론 세상에 나와 대중을 만난다는 것이 이렇게 무섭고 냉정한 일인지 몰랐다. 자기 안의 불안과 싸우는 건 배우라면 짊어지고 가야 할 평생의 숙명 같다. 지금은 흔한 말이 됐지만 ‘우리,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대사를 좋아한다. 우리 모두의 내면엔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 그걸 어떻게 대면하고 다스릴지가 문제다. 개인적으로 항상 주변 지인들에게 내가 나태해지거나 연기가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으면 뒤통수를 세게 때려달라고 부탁한다. 스스로에게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일과 생활의 균형을 잡고 조율하는게 더 중요하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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