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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꼭두각시, 그 세밀한 초상
2002-05-02

<채플린>

<채플린>의 저자인 데이비드 로빈슨은 코미디영화에 관한 한 신뢰할 만한 비평가 가운데 한명이다. 예를 하나 들자면, 옥스퍼드대학 출판사에서 나온 <옥스퍼드 세계 영화사>(The Oxford History of World Cinema)의 무성 코미디 시대 관련 글과 찰리 채플린 박스 기사를 집필한 게 로빈슨인데 이건 그가 그 방면에서는 대단히 권위있는 필자임을 일러준다. <채플린>은 한 뛰어난 코미디 감독 겸 배우와 코미디영화(사)에 대한 전문가인 바로 그 저자가 어느 정도의 지식과 정열, 끈기, 근면성, 꼼꼼함 그리고 집요함을 가지고 자신의 관심 분야에 다가가는가를 보여주는 노작(勞作)이다.

그런데 저서에 쏟은 저자의 엄청난 에너지는 그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굉장한 부담감부터 갖게 만든다. <채플린>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겠다는 결심을 한 독자라면 1천 페이지가 넘는 그 방대한 분량에 주눅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먼저 다져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을 먹고 읽기 시작해도 이 책은 의외로 잘 읽히지 않을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이건 저자가 집필에 들인 노력이 너무도 큰 탓일 터이다. 로빈슨은 채플린이란 한 사람의 전기를 쓰면서 꽤 여러 세대를 거슬러올라가면서 그의 가계(家系)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하면 독자에게 마치 채플린 주위의 사람들을 모두 한번씩 만나게 해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많은 주변 인물들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이러니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주의력을 집중하지 않는다면 로빈슨의 책을 읽기란 자칫 따분해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처음 가졌던 부담감만 슬쩍 밀어버리고 또 충분한 집중력을 가지고서 독서에 들어간다면 <채플린>은 읽기의 수고로움을 보상해주는 책이다. 책을 읽어가는 중에 서서히 우리는 ‘과연 어디서 입수했을까?’가 궁금해질 정도로 극히 사소한(!) 자료들을 성실하게 수집하고 종합하는 저자의 노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 책의 머리말에서 로빈슨은 채플린이 인생에서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명성의 절정기에 추종자들에게 우상화되고 사랑을 받았던 만큼 매도당했으며 그야말로 알거지에서 부자가 된 유례를 찾기 힘든 극적인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여전히 오류를 범하는 어쩔 수 없는 한 인간으로 남아 있었다는 점”이라고 말하면서 “복잡한 인물”로서 채플린을 이해해 보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저자의 강박적인 성실함은 저서의 목표에 비추어 꼭 필요한 태도였을 것이고 결국 그는 그 태도를 견지하면서 채플린이란 ‘복잡한 인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야 만다. 이제 우리는 그간 우리가 접했던 그 많은 다이제스트 전기들이 ‘인간’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인지 회의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물론 <채플린>이 그려낸 인간 채플린에는 당연히 장 콕토가 “현대의 꼭두각시”라고 부른 대중 예술가 채플린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한다. 로빈슨은 채플린의 코미디는 그의 생각과 감정의 ‘표현’이라는 식으로 설명을 하며 그가 어떻게 작업을 했는지도 빈틈없이 기록해간다. 그리고 이 엔터테이너를 그가 활동했던 영역 내의 역사 안에 위치시키기도 잊지 않는다. 이만하면 <채플린>은 풍족한 책 읽기 경험을 선사해준다고 감히 말해도 될 듯싶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