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문득 떠오른 스토리 아이디어 하나. 시나리오로 발전시키면 꽤 재밌을 것 같다. 이번엔 정말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름. 구조가 덜컹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매력적인 이야기다. 대박 조짐! 입조심을 해야지. 함부로 누군가에게 말했다가 아이디어를 도둑맞을지도 모르니까. 가을. 진척이 안 되고 있다. 플롯은 나쁘지 않은데… 캐릭터가 문제인가? 캐스팅만 잘되면 단점을 보완할 수 있지 않을까. 올해 안에는 무조건 끝내자. 겨울. 다 망했다. 이제 꼴도 보기 싫다. 쉬고 싶다. 그냥 영화 말고 다른 걸 할까. 다시 봄. 몇해 전 썼다 만 트리트먼트를 다시 꺼냈다. 인제 보니 괜찮은 것 같다. 새롭게 시작하자. 느낌이 좋다. 이번엔 진짜를 써야지, 진짜를.
창작의 사계 같은 이 순환은 주기만 다를 뿐 항상 반복된다. 때론 하루에 수차례에 걸쳐 경험한다. 바다의 물이 증발해 대기의 수증기로 응축되고, 어떤 고점을 찍으면 구름이 비가 되어 땅에 내리고 다시 해수로 모이듯이 크고 작은 모든 일에서 이런 지구의 물순환과 비슷한 경험을 한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순환이 되지 않거나 중단되는 일이다.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잘못된 결정을 내려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나도, 능력이 없어 스스로의 오류를 알지 못하는 현상) 같은 인지 편향이 대표적이다. 배움이나 경험의 초기 단계엔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다가도, 점차 경험이 쌓이면서 과대평가된 능력의 한계를 인식하게 된다. 자신감은 이제 열등감으로 변해 하향곡선을 그리며 바닥을 치지만 이때 훈련을 멈추지 않는다면 이후 향상된 능력으로 자신감을 서서히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더러는 자기 환멸의 계곡에서 더 이어나갈 여력이나 동기를 찾지 못해 그 이후의 완만한 상승을 경험하지 못한다.
더닝 크루거 효과가 그리는 경험과 자신감의 비례 곡선은 재미있게도 가트너의 하이프 사이클(Hype Cycle)과 닮았다. IT산업쪽에서 생겨난 하이프 사이클은 시장에서 신기술에 대한 기대감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양상을 경험적으로 나타낸 곡선이다. 신기술이 시장에 나오면 마치 세상을 바꿀 듯 기대감이 치솟아 관련 산업은 호황을 맞지만 대개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거품이 꺼지고 내리막을 그린다. 그러다가 살아남은 소수의 생존자들에 의해 완만하게 회복한 후 이를 유지하며 시장에 안착한다. 더닝 크루거 곡선이 자신에 대한 내부 능력과 기대감의 관계 변화라면 하이프 사이클은 외부에 존재하는 능력에 대한 기대감의 변화라는 점만 다를 뿐 양상은 같다.
최근에 30년 먼저 앞선 길을 가고 있는 선배 감독을 오랜만에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버티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스스로 고립되지 말자는 당부도 보탰다. 지금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감과 열등감, 기대감과 환멸의 수많은 곡선을 지나고 있는 모든 동지들을 떠올렸다. 오늘도 우리, 버티자. ‘존버’는 이긴다. 애초에 기대했던 것과 다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