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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픽처스] <4등> 정지우 감독, “국가 주도의 엘리트 학원스포츠 틀을 깨야”
김성훈 사진 오계옥 2019-06-07

<4등>은 개봉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 중이다. “관객과의 대화를 이렇게 많이 한 영화는 <4등>이 유일하다”는 정지우 감독의 말대로, 지역공동체나 청소년 영화 캠프 등 여러 곳에서 <4등>을 찾고 있다고 하니 그만큼 영화가 던지는 윤리적인 질문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잘 알려진 대로 <4등>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열두 번째 인권영화 프로젝트로 제작됐다. 정지우 감독에게 전작 <4등>은 “부모로서 고민과 자백이 담겨 있는 작품”인 동시에 “어떤 행동을 하는 데 윤리적인 기준점이 된 영화”라고 한다. 오랜만에 만난 정지우 감독은 신작 <유열의 음악앨범> 막바지 후반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시나리오를 쓰기 전 다양한 종목에서 활동하는 운동선수들을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종목과 상관없이 그들은 무척 힘들어 보였다. 요즘 학원스포츠는 공부와 운동을 병행한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매일 운동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게 현실이다. 재미나 여가 활동의 일환으로 생활 스포츠를 하다가 재능을 발견해 전문 체육인으로 성장하는 사례는 한국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여러 종목 중 수영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가 뭔가.

=개인이 혼자서 버텨야 한다는 힘겨움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감이 영화적으로 매력적이었다. 또 그래픽노블 <염소의 맛>(작가 바스티앙 비베스)을 보고 아름다운 물속 장면을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운동선수뿐만 아니라 그들을 뒷바라지하는 학부모들도 많이 만났다고.

=수영장에서 수십여명의 학부모들이 짝을 지은 채 아이가 레슨받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시합 때 도시락을 싸들고 와 아이를 지켜보는 마음은 다 비슷했다. 혹여 아이들이 다치지 않을까 조마조마해하고. 학부모들은 자신이 무너지면 아이가 무너진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준호(유재상)가 수영을 그만두겠다고 말하자 준호 엄마가 “엄마가 너보다 더 열심히 했는데 네가 무슨 권리로 수영을 그만둬”라고 말하는데, 말도 안 되는 논리이지 않나. 아무리 꼬마라도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준호의 부모는 자신의 인생을 아이에게 쏟아부었기에 아이의 문제가 곧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준호를 늘 4등만 하는 선수로 설정한 이유가 뭔가. 선두를 다투는 만년 2등 또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나 콤플렉스를 잘 드러낼 수 있지 않나.

=재능과 노력, 운과 운명 같은 키워드로 맺어진 만년 2등은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처럼 상대와의 경쟁이나 경쟁 과정에서 드러내는 존재감을 표현하기 적합하다. 반면에 4등이라는 숫자는 코 앞에 벽이나 문이 있는, 가장 아슬아슬한 경계선이라는 점에서 2등보다 훨씬 더 가혹하다. 현실에서 손가락 하나에 의지한 채 대롱대롱 매달린 느낌이 4등이 됐다, 안 됐다와 비슷할 것 같다.

-이야기를 준호가 아닌 광수(박해준)의 16년 전 과거로부터 시작한 건 엘리트 학원 체육이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인가.

=최근 재판이 진행 중인 한 체육단체의 폭력 사태를 보면,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가 국가 주도의 엘리트 스포츠를 운영하는 체육단체를 이끄는 관료 중 어떤 사람이 악마적이라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내가 이 문제를 바라보면서 느낀 건 그렇지 않다. 국가가 주도하는 스포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은 그것을 전담하는 관료들을 두고, 종목마다 단체를 만들며, 재능 있는 선수들을 태릉선수촌에 입소하게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4년마다 한번씩 밤잠을 설치며 선수층이 옅은 국가가 금메달을 따는 쾌감을 느끼며 평소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들이 스포츠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체육 관료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었던 거다. 태릉선수촌에 입소한 선수들은 20대 중반까지 선수 생활을 한 뒤 연금을 받는데, 가장 성공한 선수들이 받는 연금액은 백십여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태릉선수촌에 입소하지 못한 선수들은 비정규직의 전문 코치로 활동하게 된다. 1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려면 우수한 성적을 낼 수밖에 없고, 짧은 시간 안에 성적을 내기 위해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결국은 국가가 주도하는 엘리트 학원스포츠의 틀을 깨야 한다.

-레인이 있는 수영장은 경쟁이 치열한 전쟁터인 반면, 레인을 걷어낸 수영장은 무척 평온해 보인다.

=청소년들과 영화를 보고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정말 좋아하는 게 뭐니?’ 같은 질문을 하면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비참한 일이다. 이건 우리가 레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야 할 문제인가 싶다. 수영장에서 레슨이 끝나면 레인을 다 걷어내고 어르신들이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아쿠아 에어로빅을 추신다. 음악은 쨍쨍 울리고 춤은 아주 재미있다. 그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면 불과 30분 전 초 재고, 호루라기를 휙휙 불며 정신이 혼미했던 상황은 온데간데없다.

-영화를 극장에서만 보는 시대는 지났는데 이런 변화를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나.

=최근 플랫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면서 무슨 상황이 펼쳐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산업의 흐름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정말 모르겠다. 관객이 원하니까 특정 영화만 극장에 거는 건지, 관객이 특정 영화밖에 보지 않는 건지 닭과 달걀 중에서 어느 게 먼저인지 알 수 없지만, 관객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영화를 선택하는 권리를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인생이 조금은 풍요로워지지 않겠나.

● Review_ 준호(유재상)는 만년 4등 수영선수다. 재능이 없으면 속 편하게 취미로만 시키면 되는데, 또 그렇지도 않아 준호 엄마(이항나)의 속은 대회가 열릴 때마다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준호 엄마는 실력 있다는 수영 코치 광수(박해준)를 소개받고, 그에게 준호를 맡긴다. 16년 전 아시아대회 신기록을 달성한 국가대표 출신인 광수는 당시 폭력사건에 휘말려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4등이 낮은 성적이 아닌데 뭐 어때,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영화를 보면 그게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준호는 훈련이 힘들어 운동을 그만두고 싶지만, 준호가 곧 자신의 삶이나 마찬가지인 준호 엄마는 “(준호가 코치에게) 맞는 것보다 4등 하는 게 무섭다”고 말한다. <4등>은 일상이 수영장 레인인 한국 사회에서 아이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작품이다.

● 추천평_ 김성훈 판타지가 아닌 진짜 희망을 보았다 ★★★★ 김혜리 메시지를 넘어 역영하는 드라마. 곳곳에서 반짝이는 시적인 순간 ★★★☆ 이화정 레인을 거스르는, 아름다운 유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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