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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레몬>
김송희(자유기고가) 사진 오계옥 2019-05-21

<레몬> 권여선 지음 / 창비 펴냄

“언니가 죽었다.” 몇년 간격으로 발표되는 권여선의 소설들을 비정기적으로 따라읽고 있었던 나는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이렇게 착각하고 있었다. 언니를 잃은 후 다언과 엄마의 삶은 망가진다. 다언에게 언니 해언은 내용 없이 텅 빈 형식의 아름다움으로 기억된다. ‘자기 신체의 아름다움을 우연히 해변에서 주운 예쁘장한 자갈 정도로 취급’하고, ‘어린애처럼 무심하고 무욕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까지 속옷을 잘 챙겨입지 않는 부주의함으로 엄마 가슴을 철렁하게 했던 ‘몹시 드물고 귀하게’ 예뻤던 ‘나’의 언니. 그러한 언니가 죽은 후 엄마는 죽은 언니의 이름을 혜은으로 개명하는 데 집착하고 다언 역시 방황하다가 언니에 가깝게 얼굴을 고쳐나가는 것에 몰두한다. 가족의 죽음은 원래 극복될 수 없다. 더구나 사건은 미제로 남았고 그날 언니의 행적은 미스터리가 되어 다언의 머릿속에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언니의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됐던 두명의 남자 한만우와 신정준, 목격자로 나선 윤태림과 다언의 선배 상희까지. 오래 전 발생한 해언의 죽음은 17년이 흘러서도 사람들을 쥐고 흔들고 흐트러진 삶은 끝내 회복되지 않는다.

누가 해언을 죽였을까, 다언은 취조실에 마주앉은 형사와 용의자를 상상한다. 증언으로 기록된 언니의 잔상에서 시작된 미스터리는 해결되기 위해 거기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냥 그 자리에 존재함으로써 물수제비처럼 파장이 되고 누가 진짜 범인인지를 파헤치는 것은 중요치 않게 된다. 대신 삶에 찌든 가난의 냄새와 죽음의 그림자, 그것이 가혹하게 망가트린 인생과 그럼에도 살아남은 무구한 표정, 잔여물처럼 가라앉은 슬픔의 감각만이 깊게 마음을 파고든다. 2002년 처음 연재된 <반바지>로부터 2019년 <사양>에 이르기까지, 8편의 조각난 이야기들이 모여 하나의 큰 그림이 되기까지, 살아남은 자는 생의 의미를 찾아간다.

벌레

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식당 주방에서 일한다는 그들 남매의 엄마는 난쟁이였다. 선우를 좀더 가혹하게 눌러놓은 것처럼 작았다. 그 엄마를 보자 이상하게도 내가 앞으로 어디를 찾아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 지가 분명해졌다. 내가 살아갈 방향도 정해졌다.(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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