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준의 집은 방이 여럿이었다. 우지는 차림이 깔끔했다. 오기가 눈을 떴다. 그 무렵에는 모든 것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개들이 너무 짖지 않는다. 남편은 제조사 담당자와 통화하고 있다. 유는 갓 부서 배치를 받은 진에게 자신을 유능한 대리라고 소개했다. 뜨거운 걸 잘 마시면 처복이 있다.
편혜영 소설집에 실린 8편의 단편소설 앞 문장을 이어봤다. 다른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처한 불운은 색이 다르지만 첫 문장을 이어보니 이것이 모두 하나의 선 위에 놓인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이 소설들의 첫 문장을 읽는 일은 불쑥 남의 정원, 남의 안방, 남의 서재로 한발을 내딛는 것이다. 그것은 무례하지만 남의 세계로 들어가 그들에게 갑자기 닥친 불운과 그것의 연유,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되짚어봐도 도무지 알 수 없이 엉망이 되어가는 삶을 들여다보게 한다. 편혜영은 이 책에 원래 ‘우리들의 실패’라는 제목을 붙여두었다고 한다. “우연에 미숙하고, 두려워서 모른 척하거나 오직 잃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여서. <소년이로>의 소진은 유준의 집이 점차 망가지는 것을 본다. 동네 유지였던 유준의 아버지가 쓰러진 후 그 집이 어떻게 서서히 몰락하는지. 넓고 풍요로웠던 유준의 집은 암막커튼을 친 그 집 안방처럼 어둠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빨려들어간다. 커다란 6인용 식탁이 쓸모없어지고, 외국 술로 가득 찼던 장식장의 술들이 비워지고, 재정 문제로 간병인과 고용인이 시간제로 바뀌는 것. 유준의 엄마가 의심이 많아지고 유준이 학교에서 괴롭힘의 대상이 되는 것. 그러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에 소진은 충격을 받는다. 소진과 함께 유년의 눈으로 유준의 집이 쇠락하는 것을 지켜보며 삶의 비정함을 다시금 본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남의 불운 앞에서 본색을 드러내고, 누구나 무방비하게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게 인생임을.
몰랐던 것
대신 우리가 잃은 것을 생각했다. 그것을 어떻게 되찾을지 궁리하고, 못 찾는다면 없는 채로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했다.
남편에 대해 잘 알 만큼 오래 살지 않았다는 생각도 했다. 이제는 남편이 상대와 화제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50년 가까이 살아왔지만, 나를 툭 치고 가는 임시교사에게 분노를 느끼는 인간이 될 줄 몰랐다.(<잔디> 1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