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두 번째 백수 시절, 가을볕 좋은 어느 날. 책 한권 들고 마을 뒷산에 올랐다. 산이라고 부르기엔 높지 않아 딱히 이름도 없는 언덕배기에는 흔한 운동기구와 간이 정자가 있었다. 벤치에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고 있는데, 60대쯤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일회용 카메라를 건네며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꽤 본격적인 등산을 할 법한 복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동산의 정자에서 기념사진이라고…? 무의미한 정자 기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의 표정은 소풍 나온 아이처럼 너무도 해맑았다. 다리 한쪽을 정자 기둥 받침대에 올리고 집게손가락을 볼에 대는 깜찍한 동작을 취하는 순간, 당황스러워 찰칵. 카메라를 돌려받은 남자는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 시간여행자다! 미래에서 온 사람.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굳이 이 시간, 이 장소에 와서 내게 기이한 기념사진을 요청할 리 없었다. 혹시 그는 미래의 내가 아니었을까? 체구도 비슷하고. 아, 나처럼 얼굴에 흉터가 있는지 제대로 얼굴을 봤어야 했는데. 그래, 그는 과거의 자신이 찍어준 기념사진을 갖고 싶었던 거야.
한때 미국 작가 폴 오스터가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NPR)에서 청취자를 대상으로, 허구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일어났던 경험, 우리 일상에서 어떤 신비스러운 힘이나 알 수 없는 힘을 드러내주는 일화들을 공모한 적 있다. 세상에 대한 관습적인 생각을 뒤집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찾았는데, 만약 그때 내가 미국에 살았다면 바로 그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날의 체험을 혼자만의 신비스러웠던 순간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다 10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친구와 옛 동네를 지나다가 그 공원에 들렀다. 자연스레 친구에게 그때 만났던 어르신 이야기를 꺼내게 됐다. 내 얘길 들은 친구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그거네, 알리바이 사진. 그 할아버지, 누군가에게 거짓말로 멀리 등산 간다고 해놓고 증거 남기기 위해서 동네 뒷산에 온 거네.” 그동안 작지만 현묘하게 빛나던 순간이 한순간에 타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는 누가 봐도 빤한 셈을 어쩜 그리 희박한 확률에 던질 수 있느냐며 비웃었다.
시간 여행이 등장하는 영화엔 다른 시간대에서 온 이가 자신의 정체를 밝혀도 한동안 믿지 못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특히 미래에서 온 자신이라고 하면 더욱 믿기 힘들어한다. 상대방은 이를 답답해하고. 이럴 때를 대비해서 미리 나, 아니 우리끼리만 아는 어느 약속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예를 들어 집게손가락을 볼에 찌르는 동작 같은 것 말이다. 그래야 합리적 의심과 불신을 최소화하고, 신속하게 본론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 여행에서 시간 절약은 필수니까. 그러니 어르신, 다음에 날 만날 때는 우리 꼭 그렇게 하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