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공적인 ‘한국영화 100년 기념사업’을 전선에서 이끌 영화인, 이 상징적 위치에 추진위원회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름을 추대했다. 이장호 감독과 배우 장미희가 그 주인공이다. <별들의 고향>(1974)으로 데뷔한 이래 한국 리얼리즘 영화를 이끌며 당시 예술성과 대중성을 고루 인정받은 이장호 감독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대 집행위원장으로서, 서울영상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영화계에서 다각적인 활동을 펼쳐온 원로 영화인이다. <겨울여자>(1977)로 영화계 경력을 시작한 장미희는 약간의 공백기를 제외하면 거의 현장을 떠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배우다. 지난해에도 홍상수 감독의 <클레어의 카메라>(2018), 드라마 <같이 살아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배우로서 기록을 남겼고,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등 그간 몸담은 조직도 수두룩하다. 현장의 영화인으로서, 또한 영화계 조직의 핵심인사로서 수십년간 충무로와 함께한 두 사람은 그간의 한국영화를 기억하는 산증인이면서, 지금도 그 역사를 만들고 있는 장본인이다.
-70, 8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인 두분이신데, 의외로 같이 작업한 적이 없더라. 장미희 배우가 <별들의 고향2>(1978)에 출연했다는, 간접적인 인연이 전부다.
=이장호_ 같이 영화 만드는 것보다 2019년 한국영화 100년 기념사업을 함께하는 게 더 중요하지. (웃음) 사실 함께 사진을 찍은 것도 40년 만에 처음이다. 내가 속편을 연출했다면 함께할 수 있었을 텐데 대마초를 피운 게 문제가 돼 활동을 못했다. 대신 아주 훌륭한 선배, 하길종 감독이 속편을 연출했다. 당시 장미희씨는 신인이었을 거다. 재능이 대단해서 속으로 무당 끼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 시인 기질이 있었다. 시상이라든지 시심이 많다. 배우로서 오래가는 이유가 있다.
=장미희_ 영화인은 다 한식구라고 생각한다. 이장호 감독님은 지금도 여러 영화계 조직에서, 학교에서 쭉 활동해오신 어른이다. 영화가 인연인 거고, 영화가 고향이자 삶의 전부인 사람들이 공공의 일을 이렇게 함께하는 건 당연하다. <별들의 고향2>는 나의 세 번째 작품이었다. 감독님은 70년대 ‘영상시대’(1975년부터 약 3년간 영화 관련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진행한 청년영화운동.-편집자)에서 영화의 새로운 작업 방식을 보여준, 한국의 누벨바그를 이끈 진취적인 분이다. 동시에 <별들의 고향>이라는 대히트작에서, 시대의 캐릭터 ‘경아’를 만들어내셨다. 속편은 전편과 양상은 좀 다르지만 전편이 가졌던 뛰어난 흥행성과 작품성은 간직하고 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하길종 감독님이 좋은 작품을 만들어주셨다.
-우연찮게 발견한 또 다른 간접적인 인연이 있다. 장미희 배우가 <사의 찬미>(1991)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 라이벌 작품이 이장호 감독의 <명자 아끼꼬 쏘냐>(1992)였다. 당시 서로의 작품을 어떻게 봤나.
장미희_ 그때 <명자 아끼꼬 쏘냐>는 기획상, 여우조연상, 음악상 등 다른 부문에서 상을 많이 받았다. 영상 시대의 두 감독 중 이장호 감독님은 김지미 선생님과 <명자 아끼꼬 쏘냐>를, 김호선 감독님은 나와 <사의 찬미>를 함께했다. <명자 아끼꼬 쏘냐>는 명자라는 한국 이름, 아끼꼬라는 일본 이름, 쏘냐라는 러시아 이름을 가진 여성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작품이다. 김지미 선생님이 영화사 지미필름을 설립하고 당신이 직접 기획·제작까지 하셨고, 사할린에서 어마어마한 규모로 촬영을 했다. 말하자면 김지미 선생님의 야심작이자 대작이고, 이장호 감독님은 그 작품을 연출하신 거다. 작품이 가진 목표, 스케일, 연기와 연출에 있어 당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작품이었다.
이장호_ 김호선 선생님은 영상 시대의 동인인데, 나보다 성과가 좋다. 장미희씨가 주연을 맡은 <겨울여자>가 <별들의 고향>보다 흥행 성적이 좋았다. 모든 게 나보다 위에 있던 감독이었다.
장미희_ 감독님이 너무 겸손하고 소탈하신 분이라 이런 말씀을 하신다. 모두가 작품에 대한 경이, 존경심을 두루두루 갖고 있는 대표적인 영화인이 바로 감독님이셨다. 모든 연기자가 감독님과 함께 작품을 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한국영화 100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함께하게 됐다.
장미희_ 공동위원장직은 본인이 하겠다고 나서는 게 아니라 추대받는 것 아닌가. 영화계는 다른 어떤 조직보다 진보적이고 생각이 열려 있는 집단이다. 영화계 전체를 위해서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면, 제안을 거절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자기 일이 있고 바쁘더라도 영화계를 위해 하는 거다. 더더군다나 한국영화 100년을 앞두고 이 일을 마다한다면 그 자체가 영화인이 아닌 거다.
-추진위원회가 <의리적 구토>(1919)를 한국영화의 기점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장호_ 예전에 나온 작품들이 진짜 영화냐, 키노드라마냐라는 이야기들을 한다. 선배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영화인협회가 <의리적 구토>가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상영된 날을 기념해 ‘영화의 날’을 제정한 것을 그대로 따랐다. 한국영화 100년 기념사업에서는 어떤 주체 의식, 권위 의식을 세워 혼선을 빚을까 봐 한국영화 100편을 선정하는 행사도 진행하지 않는다. <한겨레>에서 한국영화 100편 선정하는 기획에 개인 자격으로 참여했는데, 그곳에서도 우리가 보지 못한 영화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내가 영화에 관심 갖기 전에 나온 작품은 보지 못했고, 나보다 더 어린 사람들은 70년대 영화를 보지 못한 경우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100편을 선정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안 본 영화를 어떻게 뽑겠는가. 특히 20대 관객이 전혀 모르는 영화를 뽑으면 그들에게 어찌 공감을 끌어내겠나. 또 내 나이가 돼서 젊은 사람들이 만든 영화를 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번에 아주 힘들더라.
-한국영화 100년 기념사업 중에서는 역시 100인 100편 옴니버스영화 제작에 대한 관심이 제일 뜨겁다. 한국영화 감독 100인을 선정, 한국영화 100년을 기념하는 100초까지 영상 100편을 제작한다는 구상이다. 남녀 감독 성비를 일대일로 맞춘다는 것도 흥미롭다.
이장호_ 사실 우리는 좀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기획은 했지만 100편을 만드는 사람이 모두 다르지 않나. 내용이 겹치거나 작품마다 수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까.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이 계획이 꼭 성공했으면 좋겠다. 요즘은 남녀 차이가 없다. 모든 경향이 그렇게 흘러간다. 독립영화쪽에 여성이 많으니 성비도 고르게 갈 수 있을 것 같다. 이건 잘한 선택이다.
-이 맥락에서 장미희 배우가 2000년대 초 발간된 여성영화인사전을 만드는 데 참여했던 일이 생각난다.
장미희_ 좋은 영화학자들, 주진숙 교수님과 변재란 교수님이 이런 기획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만났다. 도서출판 소도의 이순진 대표도 합류했다. 내가 활동했던 1970년대를 맡겠다며 시작했다. 교수진들이 필요성을 느끼고 처음부터 잘 기획한 덕분에 근사한 책이 만들어졌다. 최근 90년대 이후 여성 영화인을 조명한 두 번째 책도 여성영화인모임에서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생각해보면 배우 활동을 시작한 70년대는 여배우 트로이카가 각광받는 등 오히려 여성 영화인이 돋보인 시기였다.
장미희_ 표현의 자유가 없으니까 지금처럼 자유롭게 영화를 기획할 수 없었다. 남성의 이야기로 사회성이나 정치성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이 전무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은유될 수밖에 없었다. 그 시대에는 <별들의 고향>의 경아를 통해 당시 남자들의 무력함을 은유한다든지, <겨울여자>에서 군대에 간 석기(김추련)가 의문사를 당하고 이화(장미희)가 사회운동에 뛰어드는 등 여성을 중심으로 한 기획이 많았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가진 상징과 은유를 통해 영화가 석기와 연관된 이야기를 전달하면, 관객은 그 속에 숨은 코드나 기호를 찾는다. 그렇게 영화가 대히트를 치는 거다.
-한국영화 100년 인명사전 제작이 주요 사업에 포함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을 조명하나.
장미희_ 학술출판분과에서 논의하고 있다. 전면에 나서는 배우나 감독을 다루는 영화인 사전은 이미 있지만, 촬영감독, 조명감독, 미술감독 등 스탭에 관련한 것은 전무하다. 한국영화 100년 역사는 모든 스탭이 함께 일궈낸 결과다. 그들이 내놓은 대표작도 굉장히 많다. 그들의 헌신을 조명하고, 다같이 노력했던 현장 영화인들을 예우하고 공로를 기리고자 논의 중이다.
-두 운영위원장은 한국영화 100년 중 절반, 40~50년을 함께한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영화계는 어떻게 변화한 것 같나.
이장호_ 나이 먹은 사람이 예전에 영화 찍던 시절을 생각하면 마치 원시시대에서 첨단까지 온 것 같다. 옛날에는 며칠씩 밤새우며 촬영했다. 내가 영화판에 처음 들어왔을 때, 세트를 땅바닥이 아닌 니주(세트를 지을 때 바닥에 깔아놓는 마루판을 의미하는 은어) 위에 지었다. 피곤한데 잘 곳은 없지, 연출부 막내 하나 없어도 촬영은 가능하니까(웃음), 바닥과 니주 사이에 기어들어가서 잠을 청하곤 했다. 또 이승만 정권이 처음에 한국영화에 혜택을 많이 줘서 영화계에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몰려들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게 영화판인지 깡패판인지 모를 정도로 험상궂은 분위기도 있었다.
-두분 모두 대학 교수직에 오래 계시지 않았나. 젊은 영화학도들과 계속 교류가 있었던 셈이다. 학교에서 느낀 요즘 세대와 요즘 영화는 어떠한가.
장미희_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영화를 찾아보는 게 우리에게는 그 시대에는 자긍심 같은 거였다. 이를 통해 자신의 문화적 소양을 높이거나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객관적으로 키우고 비평적 시선을 가지는 거다. 또 올바르게 간다는 건 무엇일까를 책과 영화를 통해 공부의 개념으로 배웠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 많았다. 요즘 영화는 대기업의 기획·제작·배급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고, 선택의 폭 역시 협소해졌다. 영화를 보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방향성을 고민하는 시간이 부족해진 건 사실이다.
이장호_ 젊은 세대와 선배 세대의 단절을 수없이 느낀다. 우리는 기성세대의 눈치를 보며 자랐기 때문에, 자기주장이 강한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요즘 세대는 자기가 싫으면 관심을 갖지 않는다. 또 전 시대의 문화와 사정을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정말 시대가 빨리 바뀌고, 2~3년만 지나면 헤어스타일이 달라져서 촌스러운 느낌이 든다. 그리고 요즘엔 대중이 좋은 독립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없다. 스크린이 부족하니까 어디에서 상영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변화한 시점이 언제부터였던 것 같나.
이장호_ 예전에는 영화가 감독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제작자가 따라왔다. 지금은 영화가 대기업 제작·기획·투자 중심으로 움직인다.
장미희_ 영화는 시대를 반영한 거울 같은 것이다. 삶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의식 있는 작품도, 아주 상업적인 작품도,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도 만들어지면서 선택의 폭이 넓어져야 한다.
-결국 한국영화 100년 기념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라고 보나.
이장호_ 소외된 영화인들에게 어떻게 보은하느냐다. 어떻게 고맙다는 표시를 하면 그들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 이것이 가장 큰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