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이사를 도와주던 날이었다. 그날의 이사는 평소와 좀 달랐다. 지인의 집에는 예술 작품이 많아서 용달 기사님들은 서로 “작품 조심해요!”라고 경고하며 짐을 옮기고 있었다. 나는 골판지를 겹겹이 붙여 만든 작은 가구 하나를 보고 지인에게 “이거 아이디어 좋네. 직접 만들었어요?”라고 물었다. 지인은 미소를 띠면서도 자못 진지하게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작품이에요”라고 답했다. 우리 대화를 엿들은 기사님은 말했다. “난 도저히 이해가 안 가요. 그게 어떻게 작품이에요? 아무리 봐도 골판지 붙여놓은 건데.” 작품들 때문에 가뜩이나 긴장하며 짐을 나르는데, 그렇게 작품 아닌 것 같은 작품을 갑자기 만나면 난감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실제로 한 설문조사에 이런 질문이 있다. “현대미술은 초등학생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다”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예술성이란 무엇일까? 초등학생도 만들 수 있고, 골판지같이 저렴한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작품이라면, 우리는 거기서 어떤 특별한 가치와 속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현대 예술은 또 다른 극단의 특징을 갖는다. 현대 예술은 한편으로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니엘 바렌보임과 에드워드 사이드는 대담집 <평행과 역설>에서 현대음악이 극단적인 전문화의 길을 걷게 되면서 오히려 음악이 삶으로부터 멀어지고 권위를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애석해한다.
실은 내 시집에 대한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머니는 내가 시집을 낼 때마다 친한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시는데, 한번은 푸념 비슷한 말도 들었다고 했다. “아드님 시집은 읽고 또 읽어도 이해가 안 돼요. 왜 이렇게 시를 어렵게 쓰는 거예요?” 시를 일부러 어렵게 쓴 것은 아니다. 나는 시를 말놀이라 생각하고 일상어를 비일상적으로, 혹은 비일상어를 일상어처럼 구사해 특별한 정서를 빚어내려 노력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 구사가 사람들에게는 말을 비비 꼬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외계어처럼 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현대 예술의 예술성은 위기에 빠져 있다. 권위를 거부하고 쉬운 언어를 선택하면 “그게 무슨 예술이냐”라며 무시당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며 실험적인 언어를 선택하면 “하여간 예술가들은 잘났어”라며 핀잔을 듣는다. “오, 예술이다”라는 긍정적 표현은 예술보다는 차라리 비예술 활동 속에서 드러나는 창의적인 표현을 칭찬할 때 사용되곤 한다.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현대 예술은 어느 때보다 대중과 소통하는 데 적극 나서고 있다. 미술관이나 공연장 같은 고급 예술 기관에서 예술 교육과 관객 참여 프로그램은 필수다. 예술가들은 SNS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알리고 피드백을 받는다.
“예술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늘 예술가와 비평가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 자신도 안다. 자신들의 답변이 식상하고 낡았다는 사실을. 그들의 답변이 오히려 예술의 자유로운 해석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 이제 새로운 사람들이 새로운 답을 내놓을 때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