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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캡틴 마블>을 만나다
김현수 2019-03-28

<캡틴 마블>은 건너뛰고 <어벤져스: 엔드게임>만 보겠다고?

<캡틴 마블>이 전세계 흥행 수익 8억달러 돌파를 앞두고 있다. 국내 관객수는 480만명(3월 21일 기준). 개봉 전부터 국내외에서 많은 이슈를 몰고 왔지만 흥행 전선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 듯하다. 한국뿐만 아니라 북미의 반응이나 흥행 추이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분위기는 한달 뒤 개봉할 <어벤져스: 엔드게임>까지 이어질 것 같다. <캡틴 마블>과 그 뒤를 잇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페이즈 3기를 마무리하는 최종장 기능을 하는 영화들이다. <블랙팬서>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와칸다라는 무대를 바탕으로 히어로의 탄생과 빌런들과의 전쟁을 어떻게 엮어냈는지를 환기시켜보면 되겠다. 그런 점에서 <캡틴 마블>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지난 10년의 역사를 정리함과 동시에 어벤져스 이후 새로운 히어로의 세대교체를 예고하는 영화라는 점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다. 혹여 <캡틴 마블>을 둘러싼 여러 논란 때문에 보기 싫으니 건너뛰고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챙겨 보겠다는 관객이 있다면 재미의 절반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브리 라슨은 이 두편의 영화를 포함해 총 7편의 영화를 마블 스튜디오와 계약한 상태로 알려졌기 때문에 앞으로 마블 영화를 보면서 브리 라슨을 피해가기는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덧붙인다.

<캡틴 마블>의 개봉을 앞두고 국내외에서 주연배우 브리 라슨이 혐오의 대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개봉 전에는 배우의 외모가 캡틴 마블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SNS에 인성을 의심케 할 만한 부적절한 사진을 올렸다는 이유로, 개봉 후에는 스토리 전개가 평이하다는 이유로, 슈퍼히어로답지 않게 열심히 뛰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크럴의 분장이 너무 부자연스럽다는 이유로, 컴퓨터그래픽이 할리우드영화답지 않다는 이유로, 그러니까 영화가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온갖 이유를 들면서 영화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국내의 불매운동 소동이나 평점 테러 혹은 해외 유튜브 채널이나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오는 격렬한 반응은 아마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입장에서도 처음 겪는 일일 것이다. 막상 영화를 보니 예상보다 정치적 이슈에 휘둘린 영화가 아니라는 반응조차 애써 무언가를 부정하고 싶은 움직임처럼 읽힌다. 그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과연 어떤 의도로 타노스에 대적할 히든카드로 캡틴 마블을 제시한 것일까.

왜 지금 <캡틴 마블>인가

우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내에서 <캡틴 마블>이 갖는 스토리상의 위치를 되짚어보자. <아이언맨>(2008)에서 <어벤져스>(2012)라는 대형 이벤트로 이어지는 페이즈 1기에서 쉴드의 수장 닉 퓨리는 어벤져스 멤버를 어렵사리 한데 모으는 데 성공한다. 이들은 인피니티 스톤 중 하나인 테서렉트를 노리고 찾아온 로키와 치타우리족을 물리치는데 이 과정에서 각자 큰 상처를 입는다. 도시는 도시대로 히어로는 히어로대로, 그 뒷수습을 하는 과정이 사실상 페이즈 2기의 영화들이었다. 그 진통이 이어져 결국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이라는 또 다른 참사를 낳게 했고, 이제 어벤져스 멤버들은 소코비아 협정을 사이에 두고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으로 편을 나눠 싸우게 된다. 둘의 갈등은 아이러니하게도 타노스가 전 우주의 절반을 날려버린 (유니버스 안에서) 지금도 진행 중이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에서 둘은 끝내 전화 통화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예고편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듯 영화의 방향을 제시한다. 지구의 안전을 수호하던 영웅들이 과거를 돌아보며 깊은 자기반성을 하게 됐다는 것, 슈트의 존재 가치를 다시 한번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캡틴 마블의 부재’를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하필 캡틴 마블이 타노스와 대적할 파워를 지닌 존재로 디자인된 것일까. 당연하게도 현재 전세계가 고민하는 여성 이슈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물론 어벤져스라는 이름의 유래가 캐럴 댄버스의 공군 파일럿 시절 전용 콜사인에서 나왔다는 설정을 만들어 집어넣은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던 어벤져스의 고민의 뿌리가 바로 캡틴 마블이라는 것. 이들이 앞으로 보여줄 활약은 현실 변화와 맞물려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드러난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캡틴 마블이 실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려던 시도가 이전에도 있었다는 것. 처음 마블 스튜디오가 캡틴 마블의 등장을 준비했던 건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엔딩 장면에서다. 당시 연출을 맡았던 조스 웨던 감독이 캡틴 마블의 등장을 원했고 그렇게 각본 초안을 썼지만 케빈 파이기에 의해 지금으로 늦춰졌다고.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2016)에서 원더우먼이 어떻게 등장했는지를 떠올려보면 당시 조스 웨던 감독이 어떤 그림을 예상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 케빈 파이기의 생각이 캡틴 마블에는 더 이로웠다고 할 수 있다. 그저 기능적으로 쓰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캐릭터였으니까. 결정적으로 이 선택이 유효했던 이유는 덕분에 캡틴 마블이 ‘시빌워’라는 싸움에 휘말리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그녀에게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싸움이 부여되어야 했을 테니까. 또 <캡틴 마블>을 통해 ‘어벤져스’라는 빅픽처를 설계했던 닉 퓨리가 가장 처음으로 함께 활약했던 히어로가 어벤져스를 규합하는 결정적 원인이 된 테서렉트의 힘을 지닌 히어로인 캡틴 마블이라는 점도 부각된다. 이것 역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의 <캡틴 마블>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설정임과 동시에 이 영화가 이 시대에 남긴 중요한 성과로 기억될 것이다.

나의 힘은 나의 것

크리문명이 자랑하는 특수부대 스타포스팀의 비어스(브리 라슨)가 처음으로 지구에 불시착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옷차림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던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녀의 옷차림을 두고 어떤 남자는 “스쿠버다이빙 슈트”라고 놀려대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런 옷을 입고 웃어 보이지도 않는다는 이유로 “또라이”라고 욕한다. 모두가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지만 비어스는 고개를 숙이거나 걸음을 재촉하거나 상황을 모면할 생각이 전혀 없다. 오히려 자신을 욕하는 남자의 오토바이를 훔쳐 타고 달아나버린다. 실제로 브리 라슨은 <캡틴 마블>의 포스터와 예고편이 공개됐을 때 웃지 않는다는 이유로 악성 댓글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상황을 영화에 담아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그 장면이 바로 여성들이 평소 일상에서 겪는 문제라는 취지의 대답을 한 적 있다. 극중 캡틴 마블이 크리문명의 수도 할라에서 지내면서 아직 비어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때, 스승인 욘로그(주드 로)로부터 훈련 도중의 분노는 적을 유리하게 만드니까 전사는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된다는 말을 반복해서 듣는 것 역시 나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바깥의 무언가로 인해 끊임없이 자신을 옭아매거나 스스로의 힘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강요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두 캡틴 마블의 각성 이전에 그녀가 겪는 일들이다. 그녀에게 각성은 이미 포톤 블라스트를 자유자재로 뿜어낼 수 있는 엄청난 자신의 힘을 더이상 제한하지 않는 행위다. 어떤 어벤져스 멤버들도 이런 식의 각성을 하지 않는다. 대부분 히어로의 능력은 타고났거나 우연히 주어졌거나 혹은 열심히 노력해서 획득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져왔던 것이다. 몇몇 관객이 <캡틴 마블>에 “페미니즘 요소가 적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난 누구에게도 나를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다”라는 선언을 그저 캡틴 아메리카가 슈퍼솔저 혈청주사를 맞기 직전이나 아이언맨이 아이언맨 슈트를 완성하기 직전의 인간적인 모습과 비교해 크게 다르지 않거나 혹은 그에 비해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느끼기 때문일지 모른다. 캡틴 마블이 지구인 신분이던 시절에 공군의 여성 파일럿으로서 동료인 마리아 램보와 함께 온갖 핍박을 이겨내면서 성공했던 인물이라는 점도 누군가에게는 그저 평범한 인물 설정에 불과할지 모른다. 배우의 뜀박질 포즈를 지적하며 캡틴 마블 같지 않게 뛴다, 어색하다는 몇몇 관객의 지적도 곱씹어보면 브리 라슨이 캡틴 마블을 연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체력훈련을 했으며, 또 얼마나 잘 숙련된 스턴트 배우들이 액션을 연기하기 위해 노력했는지를 생각해보지 않았거나 혹은 지적을 위한 지적을 하려다보니 보이는 것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같은 이유로 그들에게는 브리 라슨이 캐럴 댄버스를 연기하기 위해 미 공군 사상 최초의 여성 전투기 조종사인 지니 마리 레빗 장군과 함께 F-15 전투기를 타고 조종비행 실습 훈련을 했다는 노력 같은 건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마블 스튜디오에서 블랙 위도우, 스칼렛 위치, 와스프, 헬라, 맨티스 등의 여성 히어로 코스튬을 주로 디자인했던 비주얼 개발 디렉터 앤디 팍은 캡틴 마블의 코스튬을 디자인할 때 그녀의 능력이 슈트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지양했다고 한다. “나는 그녀가 지닌 바이너리 에너지가 슈트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길 원치 않았다. 그녀의 힘은 그녀에게서 나오는 거니까.” 캡틴 마블이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날아오를 수 있는 건 캐럴 댄버스라는 한 여성이 스스로의 능력을 자각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섰기 때문이다. 숱한 좌절과 위기 속에서 쓰러졌던 그녀가 마침내 몸을 일으켜 세울 때의 감동은 이러한 제작진의 의지와 노력이 모여 만들어낸 결과다. 뭐든 스스로 바꿔 나갈 수 있다는 것. <캡틴 마블>이 우리에게 보여준 페미니즘이다.

● 여성 슈퍼히어로를 더 알고 싶다면

캐럴 댄버스의 오랜 친구 마리아 램보의 딸로 잠깐 등장하는 모니카 램보는 원작 코믹스 세계에서 실제로 슈퍼히어로로 활동을 하는 캐릭터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마블 세계관 내에서 선구자와 같은 여성 캐릭터이며 어벤져스의 리더 자리에 오른 최초의 유색인종 여성이다. 이러한 여성 슈퍼히어로들의 활약을 더 알고 싶다면 참돌 출판사(아르누보)에서 출간된 <마블 파워 오브 걸 캡틴 마블부터 그웬풀까지 마블의 여성 히어로 65명!>을 참고해도 좋다. 이 책에서 모니카 램보는 “자신이 맞닥뜨린 상황에 거리낌 없이 의문을 던지며 나쁜 행동들을 철폐해 나간다. 자신을 ‘자기’라 부르는 아이언맨에게 그런 호칭은 매우 부적절하다며 분명히 지적하고 당당하게 맞서기도 한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캐럴 댄버스, 즉 캡틴 마블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도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그녀가 왜 한때 ‘미즈 마블’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는지에 관한 소개도 흥미롭다. 한 가지 힌트를 이야기한다면 그녀가 선택한 호칭은 ‘미스’도 ‘미시즈’도 아닌 ‘미즈’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공그래픽노블에서 출간된 <미즈 마블>에는 이민 2세, 모슬렘, 여고생이라는 배경을 지닌 슈퍼히어로의 성장기가 담겨 있다. <라이프 오브 캡틴 마블>은 영화 속 캐럴 댄버스의 스토리를 그래픽노블로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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