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의 결근으로 그날 체육 시간에는 우리 반과 옆 반의 피구 시합이 벌어졌다. 운동장에 주전자 물을 부어 그은 선 안으로 아이들이 비좁게 섰다. 피구는 공에 맞으면 ‘죽는’ 경기다. 공을 잡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밀집도가 높은 초반엔 공에 맞은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대부분 나처럼 공을 두려워해 섣불리 잡지 못하는 아이들이다. 평소엔 나도 포식자를 피해 우르르 떼 지어 다니는 작은 물고기같이 도망가다 휩쓸려나갔다. 근데 그날은 웬 운이 따라주었는지 중반이 넘도록 살아남았다.
경기는 우리가 열세였지만 담임 선생님도 안 계신데 질 순 없다는 이상한 승부욕이 아이들 사이에 있었는지 응원의 열기가 거셌다. 여느 때라면 벌써 탈락해 여유롭게 응원이나 하고 있을 내가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덩치가 작아 그나마 공을 운좋게 피하긴 했지만 빠른 공을 잡을 실력도 용기도 없었다.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공은 마치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알 수 없는 창처럼 무섭게 느껴졌다. 사방이 막힌 가상의 우리에서 헉헉대며 그걸 피해야만 하는 상황이 한참 이어졌다. 그러다가 실수처럼 공이 품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으로 공을 잡은 것이다. 공을 맞은 게 아니라 잡았다니! 지켜보던 반 아이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공을 들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서 있었다. 아이들은 어서 공을 우리 반 다른 공격진에게 전달하라고 했다. 그들 눈에도 내가 상대편을 직접 죽이는 것보다 그게 승률이 더 높아 보였을 터다. 하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맞은편 선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미소로 공을 건넸다. 의아해하며 받아든 아이는 곧바로 내게 슬쩍 공을 던져 가볍게 날 맞혔다. 당연한 일이었다. 공은 내 가슴에 맞고 땅으로 떨어졌다. 상대 반 아이들은 웃으며 박수를 쳤다. 심판인 옆 반 선생님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다음 일은 마치 영화 속 슬로모션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내 행동을 어처구니없어하던 우리 반 아이들이 날 둘러싸고 손가락질을 했다. 그날 밤 난 친구들에게 사과하는 내용의 일기를 썼다. 뭐라고 적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튿날 선생님이 돌아왔을 때, 난 아이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했다. 하루가 지나서인지 아이들은 대수롭지 않게 내 사과를 받아주었고 그날 일은 해프닝처럼 지나갔다.
불현듯 어린 시절 일을 떠올린 건, 얼마 전 소셜미디어에서 본 글 때문이다. 피구가 어떻게 보면 이상한 게임이고, 공을 힘껏 던져 사람을 맞히는 일을 왜 놀이라고 하는지 의문이며, 그동안 그 폭력성이 과소평가된 게 아니냐는 의견이었다. 이 말 덕분에 그때 내가 왜 그런 돌발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한편 친구들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을 가졌던 내게 늦은 위로를 건넬 수 있었다. 그 게임은 적어도 어린 내겐 폭력적이었고, 난 그 고통이 계속되는 걸 원치 않았다. 당시 그 선택은 바보같이 게임을 패배하게 만든 실책이기도 했지만 내가 느꼈던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온건하며, 유일한 기회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