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작가 중에 아마 자료 조사는 내가 가장 빨리 할 거다. (웃음)” 김경찬 작가가 자신의 강점을 이렇게 꼽은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는 목포MBC에서 14년 이상 일한 베테랑 PD 출신이다. 온갖 주제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려면 “어떤 소재든 몇달 안에 대학원생과 얘기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와야 하는” 직업이란다.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영화계로, 그것도 시나리오작가로 전업한 이유가 궁금했다. “연차가 쌓이면서 회사에서 특별히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없겠다는 예감이 들었을 때,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되고 김재철 전 MBC 사장이 부임했다. 미래가 너무 빤히 보였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는 시대가 오겠다는 예감. 나를 지우고 월급쟁이로 살거나 싸우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내 성향상 싸울 거 같았다. 그리고 그 끝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2008년 말 MBC를 퇴사한 후 몇년간 외주 제작사 흥업미디어 대표로 있었던 그가 영화 일을 시작한 계기는 2012년 전 직장 MBC의 대규모 파업이었다. “원래 역사적으로 가장 파워풀했던 프로파간다 도구가 영화 아닌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서 힘을 보태야겠다는, 굉장히 순진무구한 생각을 했다.” 그렇게 쓴 첫 시나리오가 <정정보도>다. 기자가 굴종해 쓴 기사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입고, 그들을 위해 결국 자신의 기사를 부정하는 이야기다. 당시 그가 시나리오를 보낸 5명의 제작자 중에 명필름 심재명 대표도 있었고, “혹시 이 영화 말고 <카트> 프로젝트를 같이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카트>는 2007년 이랜드 홈에버 비정규직 대량 해고에 500일 넘게 투쟁한 이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노동영화다. 그렇게 “직접 시나리오를 쓴 이야기가 스크린에 상영되고, 사람들이 감상을 나누며 일으키는 변화가 눈에 보여서 신기했다”는 그는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는다. 방송 연출 경험이 긴 만큼 영화감독 데뷔도 고려해볼 법한데, 그는 “지금도 전혀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또한 연출자가 자신의 시나리오를 가져다가 마음껏 영화로 만들면 되고, 작가와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를 수 있으며 누가 맞다고 할 수 없다고 ‘쿨하게’ 반응했다.
<카트>와 함께 썼다는 <뺑반> 그리고 백상예술대상·디렉터스 컷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받은 <1987>을 아우르는 김경찬 작가의 키워드는 ‘공동체’ 그리고 ‘직업의식’이다. “혼이 비정상이던 시절에 썼던 작품들이다.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브 텍스트로는 항상 직업의식을 다뤘다. 자신의 직업의식을 지키려면 희생해야 하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굉장히 흐릿해졌다.” 그사이 그가 MBC를 나온 원인을 제공한 정권이 교체됐고, 작가가 천착하는 테마도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김경찬 작가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만 세편 정도의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 “한국은 마키아벨리적인 곳이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으니, 부강한 국가를 만들어야 국민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다는. 그런데 국민은 마키아벨리적인 철학과 정반대인,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갖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욜로, 소확행, 워라밸 같은 신조어를 생각해보자. 한국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탐색하는 것이 필요한데, 영화는 이를 해내기 정말 적합한 매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자료 조사에 일가견이 있는 그에게, 그렇게 모은 재료로부터 시나리오를 조직하는 메커니즘에 대해 물었다. 김경찬 작가가 말하는 핵심은 ‘이면’이다. “사람들이 그 소재를 놓고 상상하지 못하는 존재를 찾는다. 이질적인 존재를 스토리에 끼워넣으면서 화학작용을 일으키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영화적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러면 이야기가 새로운 가치를 제시할 수 있다.” 그래서 그에게 작품마다 설정한 ‘이면’을 차례로 들으니, 그의 필모그래피에 새로운 의미가 덧씌워졌다. “<카트>에서 태영(도경수)보다 훨씬 가난한 소녀 수경(지우)이 이제 막 나락으로 떨어진 태영의 손을 잡아주며 자기가 겪은 아픔의 상처를 너는 겪지 말라고 하는데, 이것이 곧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 아닌가. 그래서 이 부분에 굉장히 힘을 줬는데, 부지영 감독이 노동 현장에 좀더 초점을 맞추면서 일부 이야기가 빠졌다. <1987>의 경우는 연희(김태리)였다. 극중 유일하게 실존 인물이 아닌 연희를 당시 평범한 국민의 상징성으로 출연시켜 이야기의 종착역으로 만드는 구조다. <뺑반>은 임신한 우선영(전혜진)의 이야기에 힘을 주고 싶었다. 내 배 속에 있는 아이와 뺑소니로 인해 죽었을지도 모르는 실종된 아이의 생명의 가치를 놓고 모성이냐 직업의식이냐 딜레마에 빠진 여성의 이야기였다. 내가 썼을 때와 완전히 다른 얘기가 됐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언젠가 다른 작품에서 다른 스토리로 만들면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김경찬 작가에게는 10개 넘는 아이템이 있다. “계속 머릿속에서 굴리는 아이템의 작업이 필요하다. 어딘가에서 내가 갖고 있는 아이템과 연관된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 그들에게 궁금한 것을 계속 물어보고, 한 발짝 더 들어가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팍 터질 때가 있다. 2~3년 후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원하지 않을까 예상되면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가 머릿속에서 빌드업시켜온 작품 중에 관객과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유하 감독과 작업한 <파이프라인>이다. 지금까지의 작업물과는 결이 좀 다른, 재밌게 놀면서 쓴 이야기라고 한다.
“오픈을 해도 될지…. 기사에는 도둑들의 이야기 정도로만 써달라.(웃음)” 그가 은퇴작으로 삼고 싶은 이야기도 살짝 들려줬는데, 소재가 자그마치 ‘유교’다. “한국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유교 사상이 출발한, 3박4일의 어떤 역사가 있다.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데, 너무 어렵다. 유학자들을 가끔 만나서 여쭤보고 책도 보고 있는데, 지금 이대로는 죽을 때까지 고민해도 못 만들 거 같다. (웃음)”
● 가장 좋아하는 영화 시나리오_ “<미스 슬로운>(2016). 파괴의 미학이 담겨 있는, 굉장히 아이러니하면서 매력적인 이야기다. 상대방을 파괴함으로써 승리를 쟁취하고, 그 승리를 통해 행복을 포기하는 주인공이 결국 자신을 파괴해 행복을 찾는다. 그리고 이게 또 한국 사회의 삶의 방식 아닌가. 상대를 밟고 올라서야만 트로피를 쥘 수 있는 약육강식의 세계. 우리의 삶과 비슷하다. 사실 <미스 슬로운>의 시나리오작가가 한국에서 영어 학원 강사를 했는데,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쓴 게 이 영화라더라.”
● 시나리오 작업할 때 습관이나 챙기는 물건_ “작업실 의자에서 바로 옆에 보이는 TV. 일할 때 항상 TV가 켜져 있어야 한다. 20년 동안 편집기와 TV소음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TV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나에게는 TV가 세상을 보는 창이다. 원래 다른 영화에서 영감을 얻기보다 태생이 PD여서 그런지 다큐멘터리에서 아이디어를 찾을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