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 물속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갈까.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은 분명 오늘 같을 테고. 시간은 너무 안 가는데,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10대 때에는 그랬다. 미숙의 청소년기도 그렇다. 시인인 아빠가 신경질 내며 던진 책 모서리에 맞아, 미숙의 눈 밑에는 상처가 남았다. 책 제목은 <무소유>였다. 미숙은 가진 게 없었다. 가난은 주머니 속 송곳처럼 자꾸 튀어나왔다. 아빠는 시인이었지만 시집 한권 낸 후 저작 활동을 멈췄고, 책상에 앉아서 하는 일이라고는 딸들에게 가시 돋친 말을 내뱉는 것뿐이다. 가계는 엄마가 각종 부업을 해서 이어나간다. 엄마와 아빠는 자주 부부 싸움을 했고, 그때마다 미숙과 언니 정숙은 집 밖으로 피신했다. 어둔 밤이면 불을 끄고 누워 언니의 등을 보고 미숙은 중얼거렸다. “언니, 친구들이 나를 ‘야, 미숙아’라고 불러.” “그게 뭐, 너 이름 미숙이잖아.” “아니, 미숙이가 아니라 미숙아라고 부른다고.” 고민을 상담해도 언니는 들어주지 않았다. 언니는 언니대로 삶의 무게가 무거워 미숙을 보살필 수 없다. 가난이 동반한 고단함은 서로를 돌볼 수 있는 여유를 앗아간다.
공격해도 무방한 약한 존재를 10대들은 왜 이렇게 빨리 알아채는 걸까. 친구들은 미숙이를 ‘미숙아’라고 부르는 걸 놀이 삼고, 가진 게 없는 미숙에게는 친구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미숙에게 재이라는 친구가 생기고, 미숙은 재이를 통해 낯선 것을 익혀가며 처음으로 우리 동네가 작게만 느껴진다. 시간을 통과해 미숙이 어른이 되고, 이제 ‘혼자’를 지킬 수 있게 되기를 나는 조마조마해하며 지켜봤다. 어른이 된 나는 알고 있다. 성인이 되어도 미숙은 삶에 있어서 여전히 서투를 것이다. 그럼에도 아빠가 방임한 개 ‘절미’를 대신 기르며, 앞을 향해 나아가는 미숙의 곧은 등을 보며 나는 위안한다. 허기졌던 그 시간들을 이겨낸 미숙은 미숙하게나마 계속 앞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그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