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미스터리 오컬트, 오컬트 스릴러는 한국영화의 꽤 흥미로운 장르로 자리 잡고 있다. 장재현 감독의 <사바하>는 보고 나와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많아지는 영화다. <검은 사제들>(2015)에서 한국적인 요소와 무속신앙을 기독교 세계관에 절묘하게 녹여냈던 장재현 감독은 이번엔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사바하>를 두고 논쟁적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한진 잘 모르겠다. <사바하>는 가치관의 충돌이나 대립을 유도하는 영화는 아니다. 다만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선명하게 구분되는 영화임은 분명해 보인다. <사바하>의 여러 상징과 은유, 종교적인 요소들에 대해 다양한 해석과 견해가 쏟아져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에 <씨네21>에서 <사바하>에 대한 필자 세명의 각자 다른 생각을 모았다. 당신이 믿는 신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얼굴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각자의 길잡이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정나한(박정민)은 왜 그때 그 장소에서 금화(이재인)를 죽이지 않고 떠났을까. 납치당한 금화가 ‘죽는 건 괜찮은데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알고 싶다’고 하자 나한은 자신이 알고 있는, 아니 믿고 있는 진실을 들려준다. 이유를 알고 싶다는 건 <사바하>에서 반복되는 테마이자 행동의 핵심원리다. 오컬트 영화에서 질문의 종착지는 언제나 신을 향한다. 신이시여, 어디 계시나이까. 당신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동시에 질문은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영화의 동력이기도 하다. 인간(혹은 영화 속 캐릭터)은 자신이 하는 행동의 의미를 탐색하고, 관객은 캐릭터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애쓴다. 인물 각자가 믿고 있는 진실과 새롭게 밝혀지는 또 다른 사실. 그 차이가 영화를 다음 단계로 이끈다. 미스터리의 긴장은 그렇게 조금씩 드러나는 거대한 퍼즐 조각들을 맞춰가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법이다.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이 너무 많다
미스터리는 어떤 면에서 종교를 닮았다. 근거가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있기에 근거가 보이는 게임. 명확한 인과가 제시되지 않을 땐 당장 눈앞에 놓인 부스러기 같은 빵 조각을 단서 삼아 각자 나름의 추리가 시작된다. 요컨대 당신이 믿고 싶은 바를 믿을 수 있도록 허락한다. 나한이 금화를 죽이지 않고 떠나는 것은 이상하다. 81명을 세상에서 제거하는 게 사명이라면 새롭게 죽여야 할 대상이 생겼다고 해서 금화를 그냥 놓아두는 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나한의 입장에 감정이입해 한번 상상해보자. 세상을 해칠 뱀을 제거하는 중이라는 나한의 설명에 금화는 쌍둥이 언니도 함께 죽여달라고 말한다. 아마도 언니(‘그것’)를 삶에서 해방시켜주고 싶은 측은지심의 발로일 것이다. 나한은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그것의 존재를 알고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그것은 예언을 믿고 죄의식을 누르며 살인을 행하던 나한의 믿음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한 사건이다. 나한은 흔들린 믿음을 붙잡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김제석(유지태)의 녹야원을 찾아갔고 이 사실을 전했을 것이다. 그렇게 이해할 순 있다. 하지만 영화 속 어디에도 그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제시하진 않는다. 구멍을 메우는 건 온전히 미스터리의 게임을 진행해야 하는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사바하>는 일부의 지적처럼 서사적으로 구멍이 많은 영화다. 곱씹어보면 영화가 던져놓고 해결하지 않는 의문과 의도를 알 수 없는 설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예언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된 김제석은 왜 사천왕이라는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99년생 아이들을 제거하려 했을까. 사천왕들이 81명의 할당량을 다 채우지 못하고 자살을 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김제석이 잠적한 뒤 예언서까지 써가며 세운 계획은 이런 돌발변수에 대한 대책도 없는 취약한 계획인가. 금화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영화 중반부터 갑자기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쌍둥이 언니는 왜 금화의 발을 물어뜯고 태어났나. 흥미를 자극하는 상징과 설정들이 난무하는 데 비해 자신이 던진 빵 부스러기들을 성실히 회수하진 않는다.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것과 제시하지 ‘못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머리와 가슴 사이 거리만큼이나 멀다. <사바하>의 구멍들은 의도된 함정이라기보다는 방치에 가깝다. 내러티브의 내적 완결성을 중시하는 관객 입장에선 무책임하고 허술한 전개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설정이 흥미로웠던 만큼 불만과 아쉬움도 납득이 된다. 하지만 나의 진짜 의문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사바하>는 끝난 뒤 곱씹어보면 구멍이 많이 발견되는 영화다. 하지만 정작 영화를 볼 땐 그 구멍들이 눈에 띄진 않는다. 적어도 이 영화는 마지막 순간까지 별 무리없이 관객을 붙든 채 끌고 가는 힘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진짜 궁금해해야 할 질문은 이거다. <사바하>는 어떻게 관객 각자가 믿고 싶은 바를 믿도록 만드는가.
미스터리에서 출발해 오컬트로 끝나는 이야기
모든 영화는 서사의 구멍을 감추는 나름의 방식이 있다. 미스터리 오컬트물이라는 장르적 유사성 덕분에 <사바하>는 종종 나홍진 감독의 <곡성>(2016)과 비교되기도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영화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길을 걷는 영화다. 미스터리와 오컬트의 닮은 점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대상으로 한다는 데 있다. 반면 미스터리와 오컬트의 근본적인 차이는 그것을 설명해내는가와 굳이 설명하지 않는가로 나뉜다. 미스터리는 밝혀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든 밝혀나가려 전진하는 이야기고, 오컬트는 그것을 불가해한 미지의 영역에 가만히 멈춰두려는 이야기다. 재밌는 건 두 장르가 섞일 때 어디까지가 설명 가능하고 어디까지가 불가능한지 모호하게 뒤섞여버리며 흥미로운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 겹쳐진 영역을 매력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이야기의 구멍이라며 답답해할 것이다. <곡성>의 경우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일부러 불투명한 영역에 미뤄두는 쪽을 선택했다. <곡성>이 구멍을 구멍으로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전략은 장면의 밀도를 극한까지 올려버리는 것이다. 끔찍하고 더럽고 생생하고 불쾌하다고 느낄 무언가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 <곡성>의 사실적인 재현은 장면 자체를 설득력의 근거로 삼는다. 무언가 있는데 설명되지 않는(하지 않는) 상태. 그것이 <곡성>의 전략이다.
<사바하>는 질적으로 다른 영화다. 이 영화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설명하고 납득시키려 애쓴다. 실존 인물인 탁명환 목사를 모델로 했다는 사이비 종교 폭로 전문가 박 목사(이정재)는 관객을 미스터리의 세계로 안내할 길잡이다. 이 영화가 미스터리 장르의 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근간이라고 해도 좋겠다. 박 목사가 사이비 종교를 고발하는 건 생계 수단의 일종이지만 후반에 이르면 가짜를 구분해 진짜를 찾아나간다는 구도의 행위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신을 믿지 않는 불신자(혹은 흔들린 자)이기에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스폰서가 되어줄 불교종단에 간 박 목사가 사슴동산을 사이비단체라며 설득하는 과정에서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이상한 게 없다’는 것이다. 가짜라면 응당 이상해야 하는데 이상한 게 없으니, 그들이 이상하다는 논리. 얼핏 궤변 같지만 이 의문에는 ‘그들이 진짜면 어쩌나’ 하는 불안(혹은 기대)이 뒤섞여 있다. 사슴농장의 실체와 예언서의 진실이 밝혀질 때마다 영화는 가짜를 고발하는 이야기에서 진짜를 갈구하는 이야기로, 다시 말해 미스터리에서 오컬트로 색깔을 바꿔간다.
박 목사의 행보는 서사의 동력인 동시에 어쩌면 영화가 마련한 함정에 가깝다. 얼핏 미스터리 스릴러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실은 <사바하>는 박 목사의 걸음이 아니라 금화의 걸음을 따라가야 하는 영화다. 우리는 영화의 오프닝이 박 목사가 사건 조사에 착수하는 장면이 아닌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 금화와 쌍둥이 언니 그것의 탄생을 마치 신화나 전설처럼 들려주는 오프닝은 영화의 방향을 명백하게 지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박 목사가 미스터리의 근간이라면 금화는 오컬트의 뿌리다. 금화가 던져준 빵 부스러기들을 중심에 놓고 따라가다 보면 이 영화가 모든 걸 얼마나 솔직하게 말하고, 그대로 보여주는지 알 수 있다. 평면도를 펼쳐놓고 본 <사바하>의 세계관은 실로 단순하고 선명하다. 기독교, 무속, 불교가 섞여 있다고 하지만 <사바하>의 근간은 명백히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다. 여기에 모든 섭리를 통괄하는 초월자로서의 신은 없다. 다만 인간이 깨우치고 욕심을 버릴 때 다다를 수 있는 미륵이라는 특수한 상태가 있을 뿐이다. 미륵은 절대자가 아니라 일종의 이능자에 가깝다. 영화는 티베트 고승 네충텐파의 입을 빌려 “대승불교에서 미륵은 선의 극치이지만 일본에서는 밀교와 결합해 육체적인 초월자, 죽음을 초월한 자”라고 정의한다. 김제석이 바로 이 죽음을 초월한 자다. 1899년에 태어난 그는 미륵으로서 세상에 선(굶주린 사람들을 돕거나 일본에 빼앗긴 유물을 환수하는 등)을 베풀었다. 네충텐파는 김제석에게 100년 후 같은 곳에서 태어난 ‘무엇’이 당신의 적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 여기서 ‘적’이란 물리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대칭에 있는 또 다른 자, 자연의 섭리와 균형을 맞추는 존재다. 그 순간 불사의 존재였던 김제석은 살고 싶다는 욕심과 집착이 생기고 자신의 죽음을 막기 위해 악- 1999년 영월에서 태어난 81명의 여자아이를 살해하는 것- 을 행한다. 박 목사의 표현을 빌리면 “용이었던 자가 뱀이 된 것”이며 선이 악으로 바뀐 순간이다. 하지만 이건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다. 불교에선 선과 악의 구분이 없고 오직 인간의 집착이 있을 뿐이라는 해안스님(진선규)의 지적이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명료하게 설명한다. 사천왕을 모시는 사슴동산의 예언서는 김제석의 욕망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침서였고 박 목사는 끝내 김제석의 비밀을 밝혀낸다. 이 단순명료한 음모를 추적하는 과정은 철저히 미스터리 스릴러의 논리적인 정합성을 따르고, 비밀이 밝혀졌을 때 퍼즐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믿고 싶은 걸 믿는 모티브 게임
미스터리물로 보자면 <사바하>의 후반부 약점은 이런 비밀들을 지나치게 친절하게 ‘설명한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소한 문제다. 이 영화에서 진짜 모순들이 발생하는 지점은 마무리에 해당하는 오컬트적 요소들이 ‘김제석과 그것이 초월적 존재’라는 대전제를 제외하곤 하나도 회수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미스터리는 맥거핀일 뿐 <사바하>가 그리는 건 철저하게 오컬트적인 세계다. 김제석과 금화의 쌍둥이 언니 그것이 운명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설정은 인간의 인지를 벗어난 영역에서 그저 그런 셈 치고 납득할 수밖에 없는, 오컬트에 속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것과 충돌할 수 있는 다른 오컬트 요소들도 실컷 끌어들인 후 그저 방치한다.
처음에 말한 서사의 구멍들은 여기서 발생한다. 쌍둥이 언니가 금화의 발을 뜯어먹어야 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건 영화 내러티브 내부에서 제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형의 발목을 잡고 태어났다는 성경의 야곱 이야기에서 따온 모티브이기 때문이다. 왜 사천왕을 시켜 아이들을 죽이는 번거로운 방식을 택했을까. 성경의 헤롯왕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왜 사슴농장을 설립하고 코끼리를 가져왔는가.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뒤 경전을 만든 곳이 녹야원(사르나트)이고 코끼리가 불교에서 영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사바하>의 상당 장면들은 영화 바깥의 종교적 지식들에 근거한 차용일 뿐 미륵과 욕심에 관련된 부분을 제외하곤 딱히 논리적인 정합성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영화 내러티브에 뿌리를 뻗지 않고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 단지 분위기를 고양시키는 일종의 배경이자 정서적 모티브를 위한 장식인 셈이다.
동시에 이 장식들은 보고 싶은 대로 믿고 싶은 이에게 단서를 제공하는 먹음직스러운 빵 부스러기다. 바탕은 불교적 세계관인데 기독교, 무속 신앙의 모티브들이 뒤섞인 상태. 요컨대 나머지 종교적 요소들은 필연성으로 연결되어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맥거핀에 가깝다. ‘원만히 성취하소서’라는 의미를 지닌 ‘사바하’라는 제목은 오프닝에는 세로로, 엔딩에는 가로로 배치되어 있다. 십자가의 형태인 셈인데 여기에 필연성 같은 건 없다. 단지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재밌는 모티브 놀이. <사바하>가 오컬트적 요소를 뒤섞고 활용하는 방식이 이와 같다. 이런 의미 없는 오컬트 요소들을 회수하지 않는 것이 계속 신경 쓰이느냐 그저 분위기로서 즐길 수 있느냐, 그 차이가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나누는 기준이 된다.
처음으로 돌아가 서사적 개연성이 떨어지는 구멍들이 보는 동안 가려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바하>는 미스터리 구성으로서의 얼개와 오컬트 요소의 잔재미들이 분리되어 있는 영화다. 김제석의 이름이 불교의 제석천을 연상시키는 건 재밌지만, 그뿐이다. <사바하>의 진짜 반전은 기독교적 세계관(선과 악의 대립, 진짜와 가짜의 싸움)인 척 시작하다 선과 악의 구분이 의미 없는 불교적 세계관으로 넘어가는 데 있다. 세계관을 역전시키는 이 반전의 서사는 자잘한 구멍 따윈 쉽게 가릴 만큼 흥미진진하다. 박 목사는 엔딩에서 다시 묻는다. 신이여, 어디 계시나이까. 지금 보고 계시나이까. 신은 무엇인가. 개신교, 가톨릭, 불교, 밀교, 무속 등 각 종교가 말하는 신은 완전히 다른 존재, 다른 개념이다. 어쩌면 우리는 <사바하>의 내용과 트릭에 속는 게 아니라 그걸 그저 ‘신’이라고 통칭해버리는 뻔뻔한(당당한) 태도에 속는 걸지도 모르겠다. 존재하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존재하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오컬트와 미스터리는 서로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