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동네에 처음 생긴 서예학원의 첫 수강생으로 등록했다. 상가에 막 들어선 학원을 구경하다 부드러운 화선지와 향긋한 먹 냄새에 취해 서예가 뭔지도 모른 채 엄마를 졸라 학원에 등록한 터였다. 의자에 무릎을 꿇고 올라서야만 글씨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어렸던 나는, 그래서 실수로 벼루도 종종 깨먹고, 먹물도 자주 쏟아 책상도 망쳐놓았지만, 느긋하고 인자하신 선생님 덕분에 꾸준히 즐겁게 서예를 배울 수 있었다. 그 후 몇년간 나는 그 학원의 최장수, 최연소 우등생으로 활약했다. 제일 먼저 등록해 쭉 개근한 터라 진도가 제일 빨랐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평범하고 별 볼일 없던 내가 오직 열정과 근성으로 성취한 영광의 자리를 나는 꽤 자랑스러워했다. 몸살로 열이 펄펄 끓는 날에도 나는 부득불 서예학원만은 가겠다고 떼를 썼다. 마음을 고요하게 가다듬고 오직 붓 끝에 집중하다 보면 아픈 것도 잊었고, 모든 복잡한 걱정에서 벗어나 그저 내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서예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런데 4학년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나는 서예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충격을 받은 엄마가 이유를 캐물었지만, 나는 그저 오래 배워 지겹다며 잠깐 쉬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남몰래 엉엉 울었다. 실은 학원에 나를 쫓아다니던 6학년 오빠가 있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내가 오는 시간에 맞춰 와 늘 내 근처에 앉았고, 어쩌다 고개를 들면 늘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상가를 나설 때면 어디선가 그가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그는 그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내가 예쁘다고 했다. 이따금 손도 잡으려 했다. 당황한 내가 도망가면 그는 따라와 내 앞을 가로막고 또 같은 일이 반복됐다. 상가 내 상점 주인들은 늘 비슷한 시간에 쫓고 쫓기는 나와 그를 두고 남자애가 여자애를 좋아하나 보다하며 웃었다. 그도 같이 웃었다. 웃지 않는 건 나뿐이었다. 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학원이 끝날 때마다 나는 늘 홀로 전쟁을 치르다 전력을 다해 도망쳤고, 설명할 길 없는 깊은 수치심과 무력감에 빠져 아무에게도 그 일을 말하지 못했다. 그러고도 나는 계속 학원에 나갔다. 서예가 너무 좋아서, 좋아하는 내 마음을 지키고 싶어서 몇달을 시달리면서도 계속 참고 다녔다. 그러다 정말 나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을 때 나는 결국 그만두었다. 그런데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늘 나를 믿어주는 엄마와 선생님에게 서예가 싫다고 거짓말을 한 미안한 마음과 그를 언제 다시 마주칠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무엇보다 진짜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한동안 나 자신이 많이 미웠다. 내 잘못이 아니란 걸 잘 알면서도 내가 밉고, 서예도 싫어하게 됐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지키려는 마음이 모두 두려워졌다.
심석희 선수와 관련한 얘기를 처음 들은 날, 나는 서예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던 그날의 아프고 복잡한 마음이 떠올라 남몰래 울었다. 어쨌든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진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지키다 상처받게 될까봐 종종 지나치게 두려우니까. 그런 내게, 좋아하는 것을 계속 하기 위해, 그 소중한 마음을 지켜내기 위해 긴 고통의 시간을 버티며 사력을 다해온 그녀의 용기와 결심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 사랑은 기적이다. 그녀를 온 마음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