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생인 소설가 어슐러 르 귄이 여든을 넘긴 2010년부터 쓴 산문을 묶은 책,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여든을 넘겨 살아온 세상과 살고 있는 세상, 그리고 후손이 살아갈 세상을 조망한다는 일이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내게 이 책은, 어슐러 르 귄이라는 작가의 소설을 왜 그간 좋아해왔는지를 알게 해주는 글로 가득했다. 첫 번째 글 ‘당신의 여가 시간에’부터가 그렇다. 이는 하버드 대학교로부터 1951학년도 졸업생의 60회 동창회와 관련한 설문을 받은 내용. 당시 그는 하버드와 합병된 래드클리프 대학교를 다녔지만 성별 때문에(여성이라서) 하버드 대학생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질문 13번. 당신 가족의 미래 세대가 누릴 삶의 질을 무엇으로 개선할 수 있겠습니까? 그에 대한 두 번째 보기가 ‘미국의 경제 안정과 성장’이었단다. 어슐러 르 귄은 다음과 같이 썼다. “자본주의적 사고가 아니면 생각 없는 자나 할 수 있는 참으로 놀라운 사고의 표본 아닌가. ‘성장’과 ‘안정’을 같은 것으로 여길 수 있다니!” 그는 보기의 빈 공간에 ‘둘 다 가질 수는 없음’이라고 적어넣었다. ‘여가 시간’에 대한 질문도 마찬가지다. 질문 18번,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합니까? 보기 중에 ‘창의적 활동(그림 그리기, 글 쓰기 사진 등)’이 있음을 본 르 귄은 마음이 복잡해진다. “나는 항상 일하는 여성이었고 그걸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하버드 대학의 설문을 만든 사람들은 내가 평생의 업으로 삼아온 일을 ‘창의적 활동’이자 취미로서 사람들이 여가 시간을 메우기 위해 하는 일로 여긴다.” 르 귄의 의문은 질문의 핵심에 가닿는다. 남는 시간의 반대말은 아마도 바쁜 시간일 텐데, 여든이 넘으니 ‘남는 시간’ 같은 건 없다. 창작하는 시간, 운동하는 시간, 고양이와 있는 시간 등 어느 것도 ‘남는 시간’은 아니다. 이 뜨거운 냉소.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언급도 이 책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3장 ‘이해하려 애쓰기’의 ‘남자들의 단합, 여자들의 연대’라는 글은 2019년에 읽으면 다소 맥빠지는 결말이기는 하지만, “남성을 모방하지 않는 여성이 ‘여성으로서’ 남성적 기관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여전히 난제다. 한편 ‘분노에 관하여’라는 글은 2014년에 쓰였는데, 분노가 여전히 페미니즘의 가장 강력한 동력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1929년생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일까 하는 생각을 20세기 후반에 태어난 나는 하게 된다. 그리고 버락 오바마가 아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대를 사는 르 귄 역시 이 글을 쓸 때보다는 훨씬 분노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주장도 좋지만, 특히 르 귄의 개인생활을 알게 되는 회고담 읽는 맛이 쏠쏠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