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문학의 세계시장 진출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를 진행하는 해외 연구자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노벨 문학상에 대한 한국 미디어의 뜨거운 관심을 언급하며 아주 기본적인 그러나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해외에서 인정받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 자동적으로 ‘국위 선양’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국위 선양은 아마도 스포츠 분야에서 두드러질 것이다. 선수들은 모두 유니폼을 입고 그 유니폼에는 국기가 새겨져 있다. 관중의 환호성과 선수들의 질주하는 몸이 하나가 돼 고양되는 열광과 승패의 드라마는 국위 선양이라는 진부한 말에 생생한 육체성을 부여한다.
문화예술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정부는 오래전부터 해외 한국문화원, 한국문학번역원 등의 기관들을 통해 한국의 문화예술을 해외에 소개하려는 정책을 추진해왔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기조를 단순히 후발주자의 과도한 인정욕망의 발로라고 치부할 수도 없다. 문화 선진국인 프랑스도 문화부 산하의 국립도서센터(Centre national du livre)를 통해 프랑스 문학의 번역과 해외 진출을 지원해왔다. 과거 냉전 시절 미국의 CIA가 공산권과의 문화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잭슨 폴록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의 유럽 진출을 배후에서 지원했다는 뒷이야기는 이제 정설에 가깝다. 스포츠를 비롯한 일부 상업적 문화 콘텐츠의 세계시장 진출과 성공은 국민들의 일상에 활력을 주고 또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인다. 그러나 한국문학의 경우 사정은 녹록지 않다. 해외시장에서의 성공 확률은 지극히 낮고 그 보상도 소수 작가들에게만 돌아간다. 더구나 예술가들은 유니폼을 입고 작업하지 않는다. 제도적인 선택과 사후적인 비평을 통해 특정 작품이 “한국 문학/예술”의 전범으로 불린다 해도 그러한 수사적 포장은 이른바 “한국적 미”와는 거리가 있다. 이를테면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한국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작가 고유의 문체로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해외에서 인정받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라는 그녀의 질문은 한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지극히 낮은 성공 확률, ‘한국문학’이라는 개념의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문학의 해외 진출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외국 문학을 읽고 감동을 받은 이유는 단순히 이국적 정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낯선 목소리들 안에는 삶과 죽음을 둘러싼 절박한 체험과 간절한 소망들이 담겨 있었고 그것들은 보편적 울림으로 내 심장과 공명했다.
세상의 모든 구석에는 숨겨진 이미지와 이야기가 있고, 그것들은 서로 만나고 교류하며 서로를 비추는 공통의 빛으로 확장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민문학의 해외 진출이자 교류였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세상의 구석들은 절대로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어떤 구석은 중심 무대로 소환되고 어떤 구석은 무대 주변에 배치되고 어떤 구석은 아무 자리도 갖지 못할 것이다. 이 불평등의 논리는 구석 안의 구성원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다음에 그녀와 만나면 그 질문을 던져야겠다고 생각했다. 하필 그녀가 참여하는 연구자 및 예술가들의 국제 커뮤니티 이름은 ‘지구적 (탈)중심’(The Global (De)Center)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