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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 엄유나 감독, "보잘것없는 사람의 귀함이 드러나는 과정을 담고 싶었다"
임수연 사진 오계옥 2019-01-10

2년 전 엄유나라는 이름이 영화계에 갑자기 툭 등장했다. 그가 세상에 내놓은 첫 시나리오인 <택시운전사>(2017)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던 당시 그가 이미 감독 데뷔작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역사적 사건에 발을 들인 소시민의 각성을 다룬 <말모이>는 <택시운전사>와 플롯이 유사하고 엄유나 감독 역시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두 영화가 비슷하다고 의식적으로 피해가려고 하면 이야기가 가야 할 방향을 주저하게 됐다. 그래서 <택시운전사>와 비슷할 수 있다는 고민은 오히려 배제했다.” 하지만 두 작품의 교집합으로 이 신인감독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일각만을 조명한 지극히 단순한 접근이다. 수학을 좋아하는 이과생이던 그는 “할리우드 오락영화부터 B급영화, 고전영화, 다소 어려운 영화까지” 섭렵하는 영화광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동국대학교 영화과에 진학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글을 쓴 세월만 10년이란다. “자주 보는 건 <다이하드>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나 <다크 나이트>(2008) 같은 잘 만든 재미있는 영화다. 코언 형제의 작품부터 고전 누아르물까지 시기마다 좋아하는 작품도 달라진다”는 그의 취향이 영화계에 어떻게 뿌리내릴지는 감독 본인도 궁금해하고 있다.

-첫 장편 연출작을 <택시운전사>를 함께 만든 제작사 더 램프와 하게 됐다.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 하는 제작자가 있다며 알고 지내는 PD가 소개해 박은경 대표를 만나게 됐다. <택시운전사> 시나리오 작업을 아주 민주적으로 재미있게 했다. 대표님이 내 의견을 잘 들어주고 대표님의 의견도 나랑 잘 맞아서 <택시운전사>가 끝나면 한 작품 더 하자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말모이 작전’은 <택시운전사> 시나리오를 쓸 때 몇번 이야기를 나눴을 만큼 박은경 대표가 아주 오랫동안 구상하던 아이템이다. 나는 사실 일제강점기의 다른 이야기에 관심이 있었고 말모이 작전은 영웅 같은 이들의 이야기 같아서 당시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박은경 대표가 보여준 말모이 작전을 다룬 <지식채널 e> 방송이 계속 머리에 남더라.

-이 소재가 극영화로서 가진 승부수는 무엇일까.

=솔직히 경험이 많지 않아서 그런 계산을 할 능력은 안 된다. 주시경 선생이나 조선어학회에 대해서는 평범한 상식 수준으로만 알고 있다가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이 말을 모아 사전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무척 귀하고 신기하게 다가왔다. 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데 짧게는 1년 혹은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우선은 내가 재미있어야 할 수 있다. 그래야 영화가 되지 않더라도 그 시간이 내게 유의미하게 남으니까.

-‘말모이’란 제목을 ‘말의 먹이’란 의미로 착각하거나 <해리 포터> 시리즈의 유명한 대사 “입 닥쳐! 말포이”로 패러디하는 사람도 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한번에 인식할 수 있는 제목이 아니라는 고민은 없었나.

=나보다는 주변에서 우려가 많았다. 부제를 달아야 하지 않겠느냐고도 하고. 그런데 ‘말모이’라는 단어 자체가 귀하다고 느꼈다. 모은다는 말이 갖는 힘이 되게 좋았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말이 모이고 말이 모이는 곳에 뜻이 모인다”는 극중 류정환(윤계상)의 대사처럼 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딱 들었을 때 직관적으로 알기 어려울 수 있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이야기의 성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느낄 거라고 봤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말모이’라는 단어가 남아서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에게도 이 단어의 의미와 역사가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박은경 대표가 한글날 특집 <도전! 골든벨>을 봤는데, 마지막 문제의 답 ‘말모이’를 학생이 몰랐다고 하더라. 그래서 우리끼리 그런 얘기를 했다. 영화의 흥행 결과에 상관없이 ‘말모이’라는 단어가 많이 알려져서 저런 퀴즈 프로그램에 문제로 나왔을 때 누구나 맞힐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조선말 큰사전>은 1929년부터 1942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그 방대한 역사 중 1941년과 1942년에 초점을 맞춘 이유가 있나.

=처음에는 1911년 주시경 선생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나 고민했다. 아주 긴 시간 이어진 작업이기 때문에 이를 최대한 담아내는 게 사전의 가치를 더 빛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 더 설명적이고 교훈적인 이야기가 되더라. 조선어학회 사건이 임박했을, 갈등이 폭발하고 가장 안타까운 시기에 배경을 맞추는 편이 더 영화적이라고 판단했다.

-이런 소재의 영화는 주시경 선생이나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 게 일반적일 수 있다. <말모이>는 까막눈에, 두 자식에게 잘해주지 못하는 한심한 아버지 김판수(유해진)의 시선을 따라간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왜 류정환이 주인공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실제로 있었다. 그런데 난 처음부터 조선어학회보다는 아무런 대가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서 김판수처럼 조선어학회와 함께한 이름 없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 중요했고, 그 점이 지금 시대에도 시의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2016년 8월부터 시나리오를 썼으니, 혹시 그해 말 촛불집회의 영향도 있었나.

=시나리오를 쓰는 중에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그런데 촛불집회와의 연관성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원래 거대한 국가권력과 싸우는 개인의 이야기를 장르물로 쓰고 있었는데, 시나리오가 잘 안 써졌다. 당시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유행했고, 누구나 헬조선에 대해 이야기하는 상황에서 나까지 살기 너무 어렵다는 이야기를 2시간에 걸쳐 하고 싶지 않다는 고민이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결국 좀더 따뜻한 이야기더라.

-<택시운전사>의 김만섭(송강호)도, <말모이>의 김판수도 아내 없이 아이들을 키우는 누군가의 아버지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의식한 부분은 아니다. 다만 비극적 상황에서 한 인물의 선택을 지켜보게 되는 이야기에서, 혼자 자식을 키우는 설정이 그들의 선택을 더 유의미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택시운전사>의 만섭은 실존 인물 김사복을 모델로 했기 때문에 당연히 누군가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었다. <말모이>는 철딱서니 없는 아버지와 그를 대신해 어린 동생을 키우는 어른스러운 아들의 관계로 시작했다. 엄마가 있었다면 아들의 모습은 좀 덜 그려졌을 거다. 또한 영화가 다루는 말과 글, 사전은 지금 시대에도 전해 내려오는 것이고, 전해 내려온다는 건 세대를 거쳐 전수되는 것이며, 그래서 아이들이 중요했다. 자연스럽게 주인공은 누군가의 아버지로 설정됐다.

-<택시운전사>의 김만섭도 극 초반 데모하는 학생들을 나무라는 식의 묘사가 등장하지만, 감옥소에 들락날락하고 도둑질을 하는 <말모이>의 김판수는 그보다 훨씬 나쁜 구석이 많은 인물이다.

=<택시운전사>는 어떤 상황에 처한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고민이 더 컸고, <말모이>는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택시운전사>는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되게 평범한, 지금 내 옆에 있는 것 같은 사람으로 설정했다. <말모이>는 평범하지만 그보다 좀더 못나 보여야 했다. 가장 보잘것없고 모자라 보이는 사람조차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본인이 갖고 있던 귀함을 드러내기를 바랐다.

-그런 판수가 조선어학회에서 가장 헌신하는 인물로 변모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다. 사람이 한순간에 백팔십도 바뀌지는 않는다. 초반에 판수는 아들의 월사금을 흥청망청 쓰고 윽박지르기도 하지만 아버지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서 자식에게 미안한 감정을 계속 갖고 있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혹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판수에게 그런 마음이 쌓여왔을 것이다. 조선어학회에서 일을 시작하고 서로 한심하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우리말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판수에게도 조금씩 스며든다.

-말모이 작전에 대해 조사한 내용 중 무엇을 극에 반영해야 하나 고민도 있었을 거다.

=사전은 1911년부터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전반에 대한 기본적인 공부가 필요했다. 1910년대 1940년대까지 연대별로 시대상도 모두 다르고. 그래도 조선어학회 관련 자료는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있은 지 몇년 지나지 않아 해방을 맞이해 당시 활동하던 분들이 이후에도 우리말을 지키는 일을 했다. 조선어학회가 지금 한글학회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시나리오 단계에서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고 영화 제작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시나리오 자체는 사건을 따라가기보다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야 했다. 다만 사전을 만드는 과정에서 필요한 일화는 몇가지 가져와서 썼다. 판수 패거리가 와서 ‘고추장’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엉덩이’ 및 유사 단어에 대한 공청회 장면은 당시 기록에서 따온 거다.

-당시 사진을 보면 조선어학회에는 남자만 있었는데 영화에는 김선영이 연기하는 자영 캐릭터가 있다.

=실제로 조선어학회에는 여성 회원이 없었지만 당시 표준어사전위원회의 공청회 사진을 보면 여자들이 꽤 있다. 사전을 만드는 일은 알려진 회원들만 한 게 아니다. 전문용어의 경우 전문가에게 뜻풀이를 맡겼는데, 각 분야의 전문가에는 남녀 구별이 없었다. 실제 회원 중에는 여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전을 함께 만든 이들 중에는 분명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영 캐릭터를 만든 거다.

-2016년 유해진 배우가 <럭키>(2015) 홍보차 한글날 특집 <런닝맨>에 나왔을 때 ‘말모이’가 언급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게 무슨 인연인가 했다.(웃음)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그를 염두에 뒀다고 들었다. 즉흥 연기로 신을 채우며 극을 보다 재미있게 만드는 유해진은 최고의 캐스팅이었다.

=선배님과 현장에서 같이 만든 장면이 많다. 시나리오에 있는 것도 즉흥 연기처럼 차지게 연기하고 즉흥 연기도 원래 있던 대사처럼 딱 들어맞게 연기하는 아주 귀한 배우다. 또 뭘 해도 관객이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면을 갖고 있다. 초반에 좀 나빠 보일 수 있는 설정임에도 이야기의 따뜻한 느낌이 전달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윤계상은 직전 작품 <범죄도시>(2017)의 강렬한 장첸 캐릭터를 생각하면 약간 의외의 캐스팅이다.

=나는 정환이 굉장히 멋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는데, 계상씨는 멋있는 사람이지 않나. (웃음) 외형적으로도 멋지지만 그가 걸어온 길이 참 멋있다. 시나리오를 쓰던 중 <범죄도시>가 개봉했는데, 캐스팅과 상관없이 그냥 호기심에 출연작을 검색했다. 정말 다양한 작품에 출연해온, 쉬운 게 하나도 없었던 배우더라.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이 그 사람을 설명해주지 않나. 그 작품들이 곧 배우 윤계상을 설명해주고, 누가 인정해주지도 않는 사전 만드는 일을 묵묵히 해온 류정환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학부 졸업 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에서 시나리오를 전공했지만 연출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감독으로 입봉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신인이 투자받을 수 있는 예산도 워낙 작고. 원래 액션이나 스릴러영화를 많이 좋아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내가 투자를 받기가 힘드니 장르영화를 만드는 데 고민이 좀 많았다. <택시운전사>가 잘되고 나서도 주변에서 작은 영화를 고민해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예산이 크고 재미있는 영화 시나리오를 한편 더 쓰고 감독 준비는 뒤로 미루려고 했는데, 박은경 대표가 어차피 연출할 거면 빨리 시작하는 게 낫지 않느냐며 먼저 제안해줬다.

-영화화되지 못한 시나리오를 쓰던 10여년의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을 보내며 얻은 게 분명히 있었을 텐데. 시나리오작가 데뷔작인 <택시운전사>와 이번 <말모이>를 보면 대중성에 대한 어떤 감이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 영화사에서 각색을 제안해 쓴 것, 장르영화가 아닌 것, 안 가리고 썼는데, 결과적으로 전부 영화화가 되지는 않았다. 안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기자님의 말을 듣고 보니 대학원을 다니면서 욕심을 내려놓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내 욕심이 컸을 수도 있다. <택시운전사> 시나리오 작업에 6개월정도 걸려 굉장히 짧은 시간에 완성했는데, <말모이> 연출부 친구들이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고 묻더라. 나한테는 <택시운전사>가 6개월 만에 쓴 작품이 아니라 10년6개월이 걸린 작품이다, 빨리 쓰려고 하지 말고 잘 쓰려고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택시운전사>가 워낙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아서 정말 감사하지만, 나는 <말모이>를 쓰면서 또 다른 절벽을 느꼈다. 이야기는 매번 새롭게 어렵고, 새롭게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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