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짧은 휴가를 받았다. 일주일의 꿈같은 방학이 지나면 더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기에 소중하게 얻은 시간을 최대한 알차고 효율적으로 쓰려고 계획을 촘촘히 세웠다. 일단 작품 하는 내내 방치된 집안 대청소를 시작으로 수년간 버리지 못한 케케묵은 짐들을 싹 비우고, 전력질주한 한해를 돌아보는 반성과 성찰의 일기를 쓰고 밀린 가계부를 정리하는 한편,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몰아 만나고, 고마운 동료들에게 다정한 손편지를 보내기로 마지막으로는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 속에서 진지하고 소박한 신년계획을 세울 예정이었다. 진짜로 나는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냥 잤다. 그렇듯 고대하던 황금 휴가를 받아든 즉시, 나는 자고 또 잤다. 그러다 깨면 조금 먹고, 누군가 부르면 그냥 없는 척하고, 쓸데없는 웹 서핑만 하다 다시 잠들고, 또 먹고, 또 누군가 찾아도 그냥 모른 척하고, 넷플릭스만 잔뜩 몰아보다 다시 잠들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실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심각한 무기력증에 사로잡혔다. 더없이 귀한 시간을 부질없이 흘려보내는 나 자신을 아무리 혼내고 달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듯한 막막한 기분. 매번 겪는 번아웃이지만 어째 그 주기가 더 빨라지고 강력해지는 느낌이 들어 좀 두려워졌다. 이러다 휴가가 끝나도, 작품이 끝나도, 영영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이상한 마음도 들었다. 가라앉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모든 것이.
그러다 서점에 갔다. 아니, 솔직히는 맛있는 거라도 먹으려고 동네를 배회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근처 대형 서점이었다. 오랜만에 아무 목적 없이 서가를 어슬렁거리다보니 연말 신간들이 앞다투어 말을 걸어왔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은’ ‘당신이 옳다’고, ‘미안하지만 오늘은 내 인생이 먼저’니깐 ‘나는 나로 살기로’ 하라고, 그리고 ‘행복한 일은 매일’ 있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결국 ‘모든 것이 마법처럼 괜찮아질’ 거라고. 얼마 전 출판사 분들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확실히 올해 출판계의 키워드는 ‘위로’와 ‘공감’이고, 전문가들의 고견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솔직한 일기가 더 친숙하게 다가온 듯했다. 표지만 스쳐도 느껴지는 모든 응원들에 나도 조금 힘이 났지만 왠지 슬퍼지기도 했다. 아니, 대체 다들 얼마나 힘든 거야. 모두 얼마나 여유가 없고 불안하기에 이렇듯 모든 힘을 소진하고 쓰러진 뒤에도 누군가 괜찮다고 말해줘야만 겨우 안심하고 숨 돌리는 거야. 우리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문득 지난주 보았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의 이른바 ‘믿음의 도약(leap of faith)’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 마일스가 자신을 믿고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화면의 위아래가 뒤집혔는데, 순간 빠르게 추락하던 그는 빌딩 숲으로 천천히 솟아올랐다. 자신을 믿고 뛰어들자 추락은 도약이 되었다. 그러니 나는, 또 우리는, 가라앉고 있어도, 어딘가로 영원히 떨어지는 기분이 들어도 괜찮다. 다시 괜찮아질 것이다. 잠시 숨 고르며 다시 자신을 믿을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다면. 그런 순간을 함께 나눌 좋은 친구들이 있다면.
그렇게 벌써 새해다. 달콤한 휴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나 자신을 믿는 것부터 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