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근·한승엽·강지이·강물결·차정윤 감독(오른쪽부터).
“영화 제작의 어려움은 어딜 가나 비슷한 것 같다.” 한국 단편영화 5편이 베트남 관객에게 공개된 뒤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국영화 현장의 분위기를 묻는 질문이 나오자 차정윤 감독은 영화는 “모두 비슷하면서도 각각 유일하다”고 답했다. 이날 선보인 5편의 영화는 서로 다른 스타일과 주제로 한국 사회의 다양한 지점들을 건드렸다. 차정윤 감독의 <상주>는 희미해져가는 존재감과 일상의 권태에 지쳐가던 중년 여성 상주가 우연히 채팅을 통해 알게 된 친구를 만나러 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큰맘 먹고 찾아간 곳에서 상주를 맞이한 건 홀로 사는 할머니다. 젊은 주부라고 신분을 속인 할머니를 만난 상주는 처음엔 당황하지만 이내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안정을 느낀다. 차정윤 감독은 “여성이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찬찬히 따라가고 싶었다. 촉박한 일정이라 물리적인 한계가 많았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좀더 다듬어서 여러분에게 다시 보여주고 싶다”고 밝혔다.
이번 단편영화제작지원은 정해진 기간에 완성해야 했던 만큼 제작과정에서 감독들의 고민이 적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중학생 소녀들의 사랑과 불안을 그린 <털보>의 강물결 감독은 “중학생 친구들이라 아역 캐스팅을 해야 했는데 퀴어영화이다 보니 쉽진 않았다. 어쩌면 덕분에 소재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여러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털이 나는 걸 고민하는 시기의 여중생들은 결국 마지막에 함께 걸어간다. 강물결 감독은 이 엔딩에 대해 “혼자 자신 내면의 문제를 극복하는 게 아니라 함께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차정윤 감독과 마찬가지로 나도 이 부분을 좀더 잘 찍어서 다시 보여드리고 싶다”며 못내 아쉬움을 드러냈다. 가정폭력을 피해 쉼터에 머무는 여성과 아이들, 그런 가족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남편의 모습을 그린 <연락처>를 두고 베트남 관객의 질문이 이어졌다. 5편의 영화가 모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는 점도 베트남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여성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에 <연락처>의 강지이 감독은 “최근 독립영화계에선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반대로 상업영화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강물결 감독은 “한국의 상업영화들은 남성 중심의 서사가 대부분이다. 독립, 예술, 단편영화들이 여성에 관심을 가지는 건 상대적으로 그런 이야기들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보탰다.
한승엽 감독의 <왜냐하면 오늘 사랑니를 뽑았잖아요>는 사랑니를 뽑은 자신을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 것을 슬퍼하는 여성의 하루를 따라간다. 사소한 일에 무관심해져 가는 세태를 독특한 스타일로 표현한 영화의 재기발랄한 상상력에 베트남 관객의 호응이 이어졌다. 단편영화 제작에서 무엇이 가장 어렵냐는 질문에 한승엽 감독은 “제작비가 넉넉했으면 좋겠다”는 솔직한 답변으로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고향으로 내려와 익숙하지 않은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 중년 여성의 삶을 그린 <나의 새라씨>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란 말을 새삼 떠오르게 만드는 영화였다. 베트남 관객 역시 한국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고 이에 대해 김덕근 감독은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아내려고 했던 건 아니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개인적인 이야기에 사회의 분위기를 자연스레 반영하는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5편의 영화들은 현재 한국 독립·단편영화계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베트남 관객에게 차분히 소개했다. 강하고 선명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보다 훨씬 폭넓고 속 깊은 이해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