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은 젊은 나라다. 9500만명의 인구 중 35살 미만의 인구가 60%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느 분야를 둘러봐도 베트남인들의 높은 자존심과 긍지, 지치지 않는 활력이 뿜어져 나온다. 베트남의 젊은 영화인들과의 교류를 위해 한국 감독들이 호찌민에 발을 디딘 12월 2일, 마침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팀이 스즈키컵 4강 상대인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날이었다. 승리를 자축하는 오토바이 행렬과 거리를 메운 수많은 인파에서 뿜어져나오는 흥겨움은 마치 2002년 월드컵의 열기를 다시 마주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베트남 축구의 선전과 이를 국가적인 축제로 즐기는 분위기는 지속적이고 가파른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베트남의 오늘을 상징한다. 이러한 성장과 팽창의 분위기는 영화산업도 마찬가지다. 1986년 베트남이 문호를 개방한 이후 자유로운 분위기와 문화적 교류 속에서 성장한 현재 베트남 젊은 세대들은 한국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으로 대중문화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 오히려 문화산업적인 기반이 이를 뒤쫓아가기 버거울 정도다. 그런 축제 분위기 속에 간과하기 쉬운 것이 사실 문화적 다양성이다. 성장과 팽창 일변도로 달려나가는 와중에 흘리고 지나가는 것들, 떠밀려가는 것들, 잊어버리는 것들을 카메라에 담아 보조를 맞추는 것이 영화가 지닌 소중한 힘이다. 제1회 한베청년꿈키움 단편영화 상영회는 한국과 베트남의 젊은 영화인들이 직접 제작한 단편영화를 통해 외적 성장만큼이나 중요한 내실을 함께 다져나가고자 마련된 프로젝트다.
한국과 베트남 양국에서 함께 진행된 스토리업 단편영화제작지원
12월 4일 베트남 호찌민 CGV빈콤센터 랜드마크81에서 제1회 한베청년꿈키움 단편영화 상영회가 열렸다. CJ문화재단이 공식 주최하는 이번 행사는 한국과 베트남의 젊은 감독들의 시나리오를 선정, 제작비를 지원해 단편영화를 완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스토리업 사업의 결과물이다. CJ문화재단은 2010년부터 작가 등 영화 부문 젊은 창작자들의 시나리오 집필을 도와 스토리업 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2018년부터 신인 영화감독 발굴 및 데뷔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단편영화 제작 부문을 신설했다. CJ문화재단은 몇해 전부터 지속적으로 해외의 젊은 영화인들과 한국의 신인감독 발굴과 소개, 지원에 힘쓰고 있는데, 이는 단지 일회성 지원에 그치지 않고 영화인들의 교류의 장을 마련하여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의미 있는 행보로 이어지고 있다. 2014년부터 시작한 한중청년꿈키움 단편영화제가 좋은 예다. 이번에 한국과 베트남 영화인들 사이 교류의 장을 열고자 새롭게 첫발을 디딘 제1회 한베청년꿈키움 단편영화 상영회는 시나리오 단계부터 제작 지원한 작품들을 통해 양국 영화의 미래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한층 도전적이고 특별한 프로젝트라 할 만하다.
<THE BACKPACK>의 멘토를 맡은 윙 황 지엡 감독.
이번 스토리업 단편영화제작지원 사업은 한국과 베트남 양국에서 함께 진행됐다. 한국에서는 올해 4월부터 응모를 시작해 수많은 영화인들이 자신의 꿈과 비전이 담긴 이야기를 모았고, 철저한 심사를 거쳐 6월 19일 5편의 작품을 최종 선정했다. 선정된 작품에는 1천만원의 제작비가 지원됐고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밀도 높은 작품을 완성, 그 결과물을 이번 상영회를 통해 공개할 수 있었다.
한국 단편 감독들. 강지이·차정윤·강물결·한승엽·김덕근 감독(왼쪽부터).
4일 진행된 상영회의 문을 연 것은 한국 단편영화 5편이었다. 차정윤 감독의 <상주>, 강지이 감독의 <연락처>, 한승엽 감독의 <왜냐하면 오늘 사랑니를 뽑았잖아요>, 강물결 감독의 <털보>, 김덕근 감독의 <나의 새라씨>는 CGV빈콤센터 랜드마크81에서 첫선을 보였고 베트남 현지 관객과의 대화도 바로 이어서 진행됐다. 단편영화 제작의 현실적인 어려움과 이를 극복하는 방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만들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들이 오간 시간이었다. 한국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길종철 한양대 교수와 민용근 감독이 베트남 관객에게 한국영화의 이모저모를 들려주는 시간도 마련됐다. 길종철 교수는 스토리텔링 전문가답게 한국과 베트남이란 국경을 넘어선 스토리텔링의 비밀에 대한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했고, 민용근 감독은 베트남 영화인들과 함께 양국 단편영화의 현실과 가능성, 나아갈 방향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오후 2시부터는 베트남 감독들의 단편 4작품이 상영됐다. 베트남의 제작일정은 국내보다 다소 촉박하게 진행됐는데 올해 6월15일부터 공모를 시작하여 250편의 시나리오가 응모됐고 그중 11명의 후보작이 피칭에 참여했다. 피칭 과정은 극장에서 발표됐고 이 현장에 다수의 영화인과 관객이 모였을 만큼 반응도 뜨거웠다. 이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선정된 5편의 작품은 11월 1일까지 무사히 제작을 완료, 이번 상영회에서 최초 상영하는 기회를 얻었다. 특히 베트남 단편영화 제작과정에는 작품별로 선배 감독들이 멘토로 참여하여 다방면에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이날 상영회에서는 드엉 디에우 리잉 감독의 <SWEET, SALTY>, 팜 디엔 안 감독의 <STAY AWAKE, BE READY>, 팜 녹 란 감독의 <BLESSED LAND>, 주 안 응우웯 감독의 <THE BACKPACK> 등 4편의 작품이 상영되어 베트남 사회의 다양한 면모와 베트남영화의 다채로운 시선들을 한껏 펼쳐 보였다. 다만 아쉽게도 윙 리 텅 하이 감독의 <DILEMMA>는 등급심사가 늦어져 이번 상영회에서는 관객을 만나지 못했다. 뒤이어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SWEET, SALTY>의 멘토로 활약한 팜 당 디 감독이 진행을 맡아 <SWEET, SALTY> 드엉 디에우 리잉 감독, <THE BACKPACK>의 주 안 응우웯 감독, <BLESSED LAND>의 배우 윙 티 민 쩌우, <STAY AWAKE, BE READY>의 프로듀서 트란 반 티와 함께 베트남 단편영화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풍성한 대화를 나눴다. 윙 티 민 쩌우는 “나는 40년 정도 영화를 했지만 여기 모인 분들이 존경스럽다. 베트남의 현실을 반영한 이런 용감한 영화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어려운 길을 당당하게 걷고 있는 여러분의 열정과 사랑에 박수를 보낸다”며 젊은 영화인들을 응원했다.
호찌민 CGV빈콤센터 랜드마크81에 모인 관객. 상영회를 앞두고 긴 줄로 늘어서 있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이유
상영이 끝난 후 오후 7시부터는 이번 상영회에 대한 갈라 이벤트와 시상식이 이어졌다. 윙 탄 키 베트남영화부 호찌민 지부장, 쩐 낫 황 국제협력부 부국장, 부딘 트엉 중앙선전위원회 미디어&출판부 국장 등 베트남측 인사와 민희경 CJ사회공헌추진단 단장, 이종석 CJ문화재단 이사를 비롯한 여러 관계자들이 젊은 영화인들의 첫걸음을 격려하고 축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했다. 민희경 단장은 “첫 번째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완성도를 갖춘 9편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번 상영회를 완성시켜준 베트남 관객의 적극적인 호응에 깊이 감사드린다”며 인사를 건넨 뒤 “이번 상영회가 지속적인 교류의 장으로 자리잡아 베트남 영화산업의 기반을 다지고 저변을 넓힐 수 있길 희망한다”고 향후의 비전을 밝혔다. 이에 윙 탄 키 베트남영화부 호찌민 지부장은 재차 CJ문화재단에 감사를 표하며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맞춰 한국과 베트남이 함께 나아갈 것을 강조했다. <THE BACKPACK>의 멘토와 심사를 맡은 윙 황 지엡 감독은 “5편의 작품을 뽑은 건 매우 힘든 작업이었지만 서로 다른 색깔의 작품들을 관객에게 전할 수 있어서 뿌듯하다. 특히 그중 2편이 여성감독 영화라는 점이 자랑스럽다. 앞으로 좀더 많은 여성 영화인들에게 기회가 돌아가길 바란다”는 발언으로 관객의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다양한 목소리를 담은 영화와 개성 넘치는 영화인들만큼 이날 행사에서 발견한 또한 가지 가능성은 베트남 관객의 관심과 열기였다. 500석에 달하는 CGV빈콤센터 랜드마크81의 아이맥스관은 한참 전부터 줄을 선 베트남 관객 덕분에 순식간에 만석이 됐고 행사가 끝난 뒤 삼삼오오 모여 축제를 즐기는 분위기였다. 이 자리에 모인 한국과 베트남 영화인들, 그리고 관객의 바람은 한결같았다. 제1회 한베청년꿈키움 단편영화 상영회와 같은 영화인들에 대한 지원과 교류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산업의 저변을 넓히고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인프라의 구축만큼 영화 인력의 양성이 필수다. CJ문화재단이 시작한 소중한 첫걸음이 다음 걸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영화가 두 나라를 잇는 소통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도 그리 먼 일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