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에 대한 강의가 끝난 후에 한 중년 여성으로 보이는 수강생이 손을 들었다. 딸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중년의 여성들이 하는 질문은 대체로 남편이나 자식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질문이다. 조금 아쉬웠다. 가족 말고 자신이 보는 세계에 대한 질문을 하면 많은 것이 달라지는데. 그런데 이분이 궁금해한 것은 딸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딸이 만나고 있는 세계에 대한 거였다.
극장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딸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했다. 입장하는 손님에게 음료수는 반입하면 안 된다는 안내를 하자 눈앞에서 음료수를 바닥에 부어버려 그 바닥을 닦고 왔다고…. 딸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 분하고 속상한 한편 딸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까짓 시급 때문에 왜 네가 무릎을 꿇고 바닥을 닦니? 우리 집이 네가 그런 일을 당하면서 돈을 벌어야 할 정도는 아니잖아, 당장 그만두라”고 했더니 딸은 더 서럽게 울더라며,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한탄하면서도 귀하게 키운 딸이 왜 그럴 때 아르바이트 명함을 내던지고 나오지 못했는지가 궁금하다고 했다.
나는 이 질문에 우리 사회에서 인권 개념이 상상되고 실천되는 방식과 그 한계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한 기업에서는 콜센터 노동자들이 성희롱과 폭언에 시달리자 고객센터 통화연결음에 “제가 사랑하는 우리 엄마가… 우리 아내가, 착하고 성실한 우리 딸이… 상담드릴 예정입니다”라는 멘트를 녹음해서 들려줬다. 고객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고 광고는 수많은 상을 탔다. 이처럼 서로가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고 가족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면 서로를 존중할 수 있다는 생각은 꽤 널리 퍼져 있다. 명절 때마다 이주노동자들의 가족상봉 프로그램이 인기리에 방영되는 것도 비록 피부색과 언어는 달라도 그들 역시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므로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의 연장선에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왜 귀하게 기른 딸은 아르바이트 작업장에서 노동권을 제대로 주장하지 못했을까. 가족 안에서 귀애한 존재로 키워지는 것과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존중받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는 “내가 너만 한 딸이 있는데”라며 삿대질을 당하고, 내가 잘못하면 부모가 소환되며, 남편의 실수가 곧 아내의 흠이 된다. 가족은 존중의 근거가 아니라 협박의 조건이다. 한국 같은 고도의 가족 중심주의 사회에 신자유주의 패치가 설치된 결과 가족 단위를 중심으로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이런 사회에서 가족과의 연결감은 사회적 연결감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실제로 콜센터 노동자 당사자들에게 가장 크게 와닿은 정책은 통화연결음이 아니라 업무중단권이었다. 성희롱과 폭언을 당했을 때 끊을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자 스트레스 지수가 떨어졌다는 결과도 발표되었고, 다른 사업장에도 확장되었다. 모든 사람은 누군가의 무엇이어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 세계속에 동등하게 존재한다는 감각이 확고해질 때에야 비로소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사랑, 성, 가족에 대한 감각 역시 소유와 배타성에서 자유와 상호존중의 감각으로 바뀔 때 분할된 세계가 이어지게 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비록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크리스마스 인사를 건네본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