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스크린에서 발견과 재발견의 기쁨을 준 배우 가운데 16명의 얼굴을 모았다.
12/03
<부탁 하나만 들어줘>의 화사한 포스터는 칙릿(Chick-lit. 젊은 여성 독자를 겨냥한 대중소설)을 각색한 로맨틱 코미디를 예상하게 하지만, 영화의 실체는 총천연색 누아르에 가깝다. 심지어 인물의 배치 구도와 서사 패턴은 1990년대 후반 이후 만들어진 이른바 네오 누아르 영화보다 더 고전 누아르에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살림 9단 독신모 파워 블로거 스테파니(안나 켄드릭)는 외양과 달리 어두운 가족사를 레이스 앞치마 주머니에 숨기고 있고, 패션 기업 홍보담당자 에밀리(블레이크 라이블리)는, 이를테면 여자 리플리처럼 살아왔다. 어느 쪽을 골라도 어엿한 팜므파탈로 손색이 없다. 영화의 첫 10분은 스테파니가 에밀리에게 일방적으로 매혹되고 이용당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둘 사이의 파워 방정식은 간단치 않다. 재미있게도 두 여자는 상반된 이유로 주류사회의 호감형과 거리가 먼 안타고니스트들이다. 이 영화에서 그리스 연극의 코러스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이웃 학부모들은 너무 극성스러운 엄마라서 스테파니를 비웃고, 에밀리는 일종의 ‘마녀’처럼 여긴다. 보통 누아르영화에서 팜므파탈의 본색을 밝히는 탐정 역은 남성주인공의 몫인데 <부탁 하나만 들어줘>에서 추적자는 스테파니다. 서로의 가면을 벗겨내기는 마찬가지지만, 스테파니쪽에서 에밀리에게 갖는 관심이 훨씬 크기 때문에 나오는 결과다. 스테파니를 그저 재밌어한 에밀리는 그를 본인이 짠 계획의 만만한 단역으로 점찍었다가 낭패를 본다. 스테파니의 주부적 스킬, 레시피와 프로젝트를 조직하는 능력, 인기 블로그 운영자로서 보유한 정보 수집력은 경찰을 앞지르는 민완탐정을 탄생시킨다. 사람들이 무시하는 페미닌한 기술과 지식이 중심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금발이 너무해>(2001)의 엘르(리즈 위더스푼)와 같은 부류다. 결국 에밀리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그를 동경하고 착실히 연구한 스테파니이고, 아내를 ‘환상의 여인’으로만 욕망해온 남편 숀(헨리 골딩)은 미스터리를 푸는 과정에 기여가 미미하다. 두 여자와 모두 관계를 맺는 숀은 심지어 욕망의 대상으로서 조차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실종된 에밀리가 죽은 줄 알았던 스테파니는 한때 숀에게 혹하지만, 에밀리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대두되는 순간 탐정으로서의 성취감과 승부욕이 로맨틱한 충동을 압도한다. 결국 예기치 못한 스테파니의 의욕과 자부심이 에밀리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든다. 자매애로 두 여자가 하나되는 엔딩이었다면 열성적 지지 관객이 늘었겠지만 폴 페이그 감독은 그러기엔 너무 포스트 페미니스트 유희왕이다.
<부탁 하나만 들어줘>까지 보고 나면 대중영화감독으로서 폴 페이그의 특징을 감잡을 수 있다.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2011), <히트>(2013), <스파이>(2015), <고스트버스터즈>(2016)는 각기 로맨틱 코미디, 경찰영화, 첩보물, 판타지의 비틀기였지만 동시에 스스로 온전한 로맨틱 코미디, 경찰영화, 첩보영화, 판타지이기도 했다. 보통의 패러디영화들에 비해 훨씬 바탕 장르의 관습에 충실하다는 의미다. 그러고 보면 폴 페이그 감독의 영화들을 장르의 재해석 내지 패러디 코미디로 분류하는 근거 중 큰 부분은, 전통적 남성 중심 장르 내에서 젠더 역할을 재배치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요컨대 폴 페이그의 영화는 누군가에게는 웃자고 해본 변용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그저 이성애 남성 중심 감수성을 채택하지 않은 정석의 장르영화일 수 있다.
12/12
1970년대 초 멕시코시티가 배경인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에는 온 가족이 <우주탈출>(1969)이라는 영화를 관람하는 장면이 있다. 필시 감독의 전작 <그래비티>(2013)의 씨앗이 됐을 법한 영화다. 5년 전 우주 공간을 유영했던 쿠아론은 <로마>에서 느리지만 완벽하게 작동하는 타임머신을 설계했다. 시간 여행의 중심에는 백인 중산층 가정의 입주 가정부 클리오(얄리트사 아파리치오)가 있다. 영화는 클리오를 바라보거나 클리오가 보고 듣는 세계를 전한다. 영화의 시작은 가장 낮은 길바닥이다. 부감으로 찍은 프레임 안으로 잠시 후 세제 거품이 낀 물이 빗자루 소리와 함께 밀려든다. 더러운 물이 포석을 덮어 이룬 수면에 하늘이 내려앉고 곧 비행기가 그것을 가로지른다. 이제 타계하고 없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나 샹탈 애커먼의 시네마가 종종 우리에게 선사했던 고요한 개안의 순간이다. 그리고 관객은 영화 후반에 이르러 이 비눗물의 춤과 대구를 이루는 파도의 이미지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마침내 조심스레 고개를 든 카메라는 마당 청소를 마무리 짓는 클리오를 시야에 담고 한동안 놓아주지 않는다. 화장실에 다녀오기를 문밖에서 기다려서 집 안으로 따라 들어가고, 방을 치우며 빨래를 모으고 하굣길 아이를 데리러 가는 클리오의 일과를 지켜본다. 좁은 별채에서 동료 가정부와 기거하는 클리오는 고용주 가족, 특히 어린 4남매를 사랑하고 아이들도 클리오의 품을 파고든다. <로마>는 확신에 찬 느린 호흡으로 관객을 클리오의 세계로 데려간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때처럼 과거와 기억은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조금씩 발끝부터 적시며 차올라 어느새 사방을 둘러싼다.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의 자전적 영화다. 극중 클리오의 고용주 가정은 감독이 기억하는 당시 쿠아론가가 모델이다. 제작진은 감독이 실제로 살았던 근방에 집을 빌려 기억에 의거해 실내를 디자인했고 감독의 가족들은 가구며 사용했던 물건들을 소품으로 보탰다고 한다. 심지어 캐스팅에서도 모델이 된 인물과 닮은 후보를 찾았다. 그럼에도 <로마>는 4남매 중 누가 어린 시절의 쿠아론 감독인지 명시하지 않는다(전생에서 뱃사람이었다고 말하는 문학적 소년이 알폰소 쿠아론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따름이다). 네 아이는 클리오를 둘러싼 ‘사람들’ 중 한명으로서 공평하게 흐릿하다. 요컨대 <로마>는 지극히 내밀한 자전적 회고이면서도 영화의 관점을 자신이 아닌 다른 인물에게 전적으로 헌정한 희귀한 경우다. 이로써 <로마>는 자전적 예술이 빠지기 쉬운 자아도취의 웅덩이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클리오는 누구인가? 삶에서 몹시도 중요한 일을 나에게 해주었으나 당연히 여겼던 누군가이다. <로마>는 그런 이에게 쓰는 늦은 러브레터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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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다를 수 없는 두 사람이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과정은 할리우드가 애용하는 서사 중 하나다. 뉴욕 나이트클럽의 이탈리아계 해결사 토니(비고 모르텐슨)와 아프리카계 천재 피아니스트 닥터 셜리(마허샬라 알리)도 마주칠 일이 결코 없어 보이는 상극이지만, 닥터 셜리가 남부 도시 투어의 수행 기사 겸 경호원으로 토니를 고용하면서 8주간 길동무가 된다. <그린북>은 두 사람이 얼마나 다른지 드러내는 주된 장치로 언어를 쓴다. 다수의 박사학위를 가진 셜리는 단정하고 함축적 문어체로 꼭 필요한 말만 하는 반면, 교양과 담쌓은 토니는 최소한의 어휘로 봇물 같은 수다를 늘어놓는다. 셜리가 구사하는 뼈 있는 농담은 토니에게 접수되지 않고, 토니가 빵 터지는 유머를 속삭이면 셜리는 귀를 씻고 싶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둘의 우정도 언어를 매개로 싹튼다. 여행 중 토니가 아내에게 꼬박꼬박 써 보내는 투박한 편지에 셜리가 약간의 문학적 터치를 보태주면서 두 남자는 화법과 억양을 넘어서는 교감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