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의 영혜가 식물이 되어버린 이유를 나는 알아야만 했다. 물구나무 선 채 뼈가 줄기가 되고 살에서 잎이 돋아난 여자, 그 연유를 예민하고 가부장의 폭력에서 찾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했다. 무엇이 망가졌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 ‘어째서’를 납득해야만 했던 나는 한강의 소설집을 세권이나 읽고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소설의 세계에서, 적어도 한강 소설의 세계에서 인간의 삶이 부서지고 추락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비극이며 사는 내내 사랑은 상실되고 상처는 돋아나고 죽음은 다가온다. <채식주의자> 연작에 뿌리가 된 <내 여자의 열매>의 아내는 평온하고 고요한 세계에 산다. 조용히 누워서 집 밖의 굉음을 들을 때마다 남편에게 묻는다. “다들 어딜 저렇게 달려가는 거야?” 한강 소설집의 여성 인물들은 고요하지만 세상에 무감하지 않다. 그들은 내내 무언가와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 가만히 서 있는 식물이 그 동물보다 격렬하게 주변 환경과 싸워가며 생명을 이어가듯이. 해쪽으로 잎을 뻗어 빛을 흡수하고, 땅의 수분을 집요하게 빨아들여 생을 연장하듯 말이다. 1995년 나온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부터 2014년 나온 <노랑무늬영원>에 이르기까지. 한강 단편소설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세권의 소설집을 다시 내면서 한강은 이렇게 덧붙였다. “이 한편 한편의 소설들을 썼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알고 있다. 이 소설들을 썼던 12년의 시간은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고, 이 모든 문장들을 적어가고 있었던 그토록 생생한 나 자신도 다시 만날 수 없다. 그 사실이 상실로 느껴져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결코 작별의 말이 아니어야 하고, 나는 계속 쓰면서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니까.” 소설집의 첫 소설에서 자기를 파괴하고 싶어 했던 주인공이 소설집의 마지막 수록 소설에서는 회복을 말한다. 어제의 한강이 고통과 슬픔을 응시했다면 오늘의 한강은 상처의 회복을 쓰다듬는다.
균열
내 얼굴은 조금 전과 똑같았다. 놀라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평온한 얼굴에는 어딘가 균열이 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랜 인내와 자책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금이 벌어지고 귀퉁이부터 허물어져온 것처럼 보였다. (<내 여자의 열매> 중 <아기 부처>, 1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