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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퀸을 만났던 계절들을 떠올리다

나는 40년 만에 퀸을 알게 되었다

<보헤미안 랩소디>

“이런 거 처음 봤지?” 나보다 7살 위의 사촌 형이 내 앞에 펼친 포스터에는 수십명의 여자들이 나체로 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그중 한명은 카메라를 향해 엉덩이를 내밀고 있었다. 당시 까까머리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그 스펙터클한 포스터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표정을 보며 깔깔거리고 웃던 사촌 형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그 포스터는 형이 고이 간직하고 있던 퀸의 1978년 7집 앨범 《Jazz》, 그것도 당시로서는 거의 구경하기 힘들었던 원판 안에서 은밀하게 튀어나온 것이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무렵부터 로큰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굣길에 레코드 가게에 들러 처음 산 음반이 키스의 《Dynasty》였고 그다음에 산 음반이 퀸의 《Jazz》였다. 물론 두장 모두다 소위 ‘백판’이라고 불리던 해적 음반들이었는데, 나는 부모님이 안 계신 날이면 이 음반들을 거실로 갖고 나와 당시 집에 있던 ‘전축’에 올려놓고 짜릿하고도 음밀한 록의 황홀경을 맛봤다. 특히 내가 처음 산 두장의 앨범은 지금도 암울하게 기억되는 중학교 2학년 사춘기의 내게 유일하게 주어진 해방구였다.

그 많은 록 밴드 중에서 내가 키스를 선택한 것은 오로지 외모 때문이었다. 초딩 취향에 딱 맞는 유치한 메이크업이었지만(물론 당시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했다) 도무지 복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의 기괴한 얼굴들은 반항심으로 가득한 나에게 일종의 대리만족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음악 역시 그들의 외모만큼 거칠고 육중하게 느껴졌다. 반면에 내가 어떻게 퀸의 앨범을 손에 쥐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쨌든 집에 돌아와 그 음반을 듣는 순간 그 화려함에 나는 전율을 일으키곤 했다. 대단한 음악이었다. 끝없이 올라갈 것 같은 목소리, 그 뒤에 화려하게 깔리는 보컬 하모니, 마치 오케스트라 소리처럼 들리는 기타 사운드. 앨범에 수록된 <Mustapha> <Fat Bottomed Girls> <Bicycle Race> <Don’t Stop Me Now> 등 모든 곡들이 귀에 꽂혔다.

실황 음반, 그 안의 록 공연장

이듬해에 나는 레코드 가게에서 나로서는 퀸의 두 번째 앨범을 집어 들었는데 그 무렵에 발매된 실황 음반 《Live Killers》였다. 두장짜리 더블 LP였는데 물론 백판이었다. 이 앨범은 키스의 《Alive II》와 더불어 록 공연장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내게 알려준 전령사였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폭죽은 터지고, 굉음처럼 들리는 기타와 드럼 소리는 내 눈앞에 번쩍이는 조명들을 실제 보이는 것처럼 만들어주었다. 어른들이 없으면 나는 헤드폰을 끼고 《Live Killers》를 들으면서 퀸의 공연장으로, 그 해방구로 슈웅 하고 날아갔다.

내가 갖고 있던 《Live Killers》는 백판임에도 불구하고 조야하지만 ‘총천연색’ 인쇄에 오리지널판과 똑같이 게이트 폴더 스타일의 디자인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그 안쪽에는 퀸 멤버들이 공연하는 사진들이 모자이크 형식으로 실려 있었는데, 퀸의 모습을 본 것은 그 사진들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 외모는 내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베이스 주자 존 디컨이 록 밴드답지 않게 평상복 차림으로 연주하는 것은 참을 만했지만 그렇게 노래 잘하는 프레디 머큐리가 몸에 착 달라붙은 은빛 옷을 입고 무대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교태를 부리는 인어공주를 보는 것 같았다. 더욱이 다른 사진에서 그는 털 난 가슴을 훤히 노출한 가죽 재킷을 입고 노래하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들은 당시 소년의 눈에 거부감을 일으켰다. 혓바닥을 뱀처럼 날름거리고 피를 토하는 키스에 대해서는 오히려 매력을 느꼈음에도 당시에 본 ‘바이시클 레이스’ 포스터와 더불어 프레디 머큐리가 남성답지 못한, 기이한 성적 매력을 강조하는 것 같은 모습들은 내게 이상한 불쾌감을 주었다. 군 장교 출신의 아버지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꽉 막힌 나는 로큰롤을 즐기면서도 그런 성적표현에 거부감을 갖는 이중성, 모순 속에서 성장했고 심지어 당시 내게는 동성애의 개념조차도 없었다.

퀸에 대해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살짝 남아 있던 무렵 퀸의 새 앨범 《The Game》이 나왔다. 레코드 가게마다 《The Game》이 유리창 앞에 걸려 있었고, 내가 단골로 다니던 미아리의 한 레코드 가게에는 레드 제플린의 새 앨범 《In through the Out Door》가 함께 걸려 있었다. 레코드 가게 아저씨는 레드 제플린이 얼마나 위대한 밴드인지 내게 장광설을 늘어놓았고 결국 나는 그의 꼬임에 빠져 레드 제플린의 앨범을 라이선스 음반이라고 불리던 ‘합법 음반’으로, 거금 1800원을 주고 샀다. 반면에 내가 퀸의 새 음반에도 관심을 보이자 아저씨는 친절하게도 라이선스 음반에는 금지곡들이 몇곡 빠졌다며 역시 백판을 권했다. 그리고 두장의 음반을 들고 문 밖을 나서는 내게 그 아저씨가 한 말은 아직도 귀에 선하다. “레드 제플린 음악을 듣게 되면 퀸 같은 그룹은 금세 시시해질걸?”

그런데 그 말은 절반만 맞는 이야기였다. 내가 처음 들은 레드 제플린의 음반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었다) 너무 어려워서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퀸의 새 앨범은 그것과 무관하게 너무도 시시했기 때문이었다. 《The Game》은 쿵짝거리는 단순한 디스코 리듬에 신시사이저 음향이 튀어나오고, 방송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는 1950년대의 진부한 로커빌리 스타일의 곡이었다. ‘맙소사, 퀸이 이렇게 될 줄이야. 어쩐지 옛날부터 옷 입는 게 마음에 안 들었어. 《The Game》 커버에 브라이언 메이를 빼고 나머지 멤버들이 머리를 싹둑 자르고 나왔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15살의 열혈 로큰롤 키드는 퀸으로부터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70년대 록 밴드들 대부분이 80년대를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대였다는 사실을 당시의 나는 알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이미 내가 좋아했던 키스의 앨범 《Dynasty》도 디스코풍의 앨범이었고, 엘리스 쿠퍼와 예스는 뉴웨이브 밴드로 변신하면서 70년대 팬들에게 한방을 먹이는 일들이 록 음악계에 줄 지어 벌어졌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 레드 제플린의 해체는 어쩌면 하나의 축복이었다.

<보헤미안 랩소디>

영국인 프레디 머큐리

당시 나는 어렸지만 동시대의 음악이 싫었다. 다른 밴드들의 변신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가운데 퀸은 80년대에도 <Under Pressure> <Radio Ga Ga> <I Want to Break Free>(이 곡의 뮤직비디오가 나왔을 때 여장한 멤버들의 모습은 정말 끔찍했다!) 등 연속해서 히트곡을 냈지만 난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고등학생 때 나는 그들의 70년대 앨범을 백판으로 감상했고 그중에서 <Bohemian Rhapsody>가 담긴 《A Night at the Opera》와 <We are the Champion>이 담긴 《News of the World》를 즐겨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살아서 ‘팝’ 히트곡을 내고 있는 퀸보다는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블랙 사바스, 핑크 플로이드, 킹 크림슨 등 이미 전설이 된 밴드들이 고등학생 시절 나의 우상이었다. 그다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는 나의 복고풍의 음악 취향은 이미 그 시절에 결정되었던 것 같다.

그룹 퀸을 처음 들은 지 거의 40년 만에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통해 그들을 다시 만난 나는, 그러므로 퀸의 열혈 팬이 아니다. 이 점은 어쩌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퀸의 열광적인 팬들이라면 이 영화가 그다지 마음에 안 들수도 있기 때문이다. 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속속들이 알고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와 모창가수의 목소리를 뚜렷이 구분하는 팬이라면 이 영화가 어색하고 부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나는 이 영화가 무척 좋았다. 어느덧 40년 전에 그들의 음악을 처음 들은 50대 아저씨로서 말이다.

영화에서도 나오듯이 젊은 시절 주변 사람들로부터 ‘파키’(파키스탄 사람들을 비하하는 호칭)라고 자주 불렸던 프레드 머큐리는 실상 동북 아프리카 해안에 위치해서 당시에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잔지바르(현재는 탄자니아의 영토)에서 파로크 불사라라는 이름으로 1946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 정부에서 일하던 인도 국적의 하급 공무원이었지만 그 역시 파키스탄 접경지역 출신으로 다른 인도인들과 달리 그 지역에 전통적으로 뿌리내려온 조로아스터교 신자였다. 한마디로 식민지 내의 소수자인 셈이다. 머큐리는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를 인도에서 다니다가 고등학생 때 다시 잔지바르로 이사 왔는데 1963년 잔지바르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을 피해 영국 미들섹스주 펠텀에 정착한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프레디 머큐리는 영국인이었다. 그는 12살 때 인도에서 ‘헥틱스’란 이름의 스쿨 밴드를 만들어 리틀 리처드의 로큰롤을 모창하곤 했는데 그것은 그가 다니던 성 베드로 학교가 인도 주재 영국인 자녀들이 다니던 학교였고 머큐리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문화적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프레디 머큐리는 영국인들 사이에서 ‘파키’였다. 뛰어난 가창력이 없었더라면 그를 받아줄 영국 밴드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1970년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를 만나고 이듬해에 존 디컨을 영입해 밴드를 완성했을 때 그 밴드에 붙인 이름 ‘퀸’(왕관 모양을 사용한 이 밴드의 로고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머큐리가 직접 만든 것이다)에서 나는 머큐리가 가졌을 무의식의 열망, 즉 경계인으로서의 혼란스런 정체성을 버리고 영국인이 되고 싶었던 욕망을 읽게 된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권위를 조롱하는 느낌의 ‘신리지’(Thin Lizzy)란 이름을 쓴 아일랜드 하드록 밴드와 비교하자면 영국 밴드 퀸의 성격은 보다 분명해진다. 프레디 머큐리(래미 맬렉)는 영화에서 매니저 존 리드(에이든 길런)를 처음 만났을 때 퀸을 “사회 부적응자들을 위한 밴드”라고 소개했지만 퀸은 분명히 펑크(punk) 밴드가 아니었다. 영화에서 보다시피 자신의 출신 지역과 부모의 존재를 감추고 싶었던 프레디 머큐리는 진정한 영국인이 되고 싶었고 그 권위와 우아함을 한편으로 동경했다.

그 모순된 내면의 결정판은 역시 1975년작 <Bohemian Rhapsody>였다. 한 소년 살인자의 고해성사라는 설정은 패배자들의 정서를 대변하지만 악몽과도 같은 살인사건과 자신의 죽음 앞에서 들리는 환청(노래는 서두에서 이야기한다. “이건 생시일까, 환상일까.”)은 오페라라는 주류 세계에 대한 비현실적인 동경을 대변한다. 이 모순의 충돌은 6분으로 압축된 4막짜리 걸작 광시곡으로 탄생했다. 프레디 머큐리는 그 열망을 어느 정도 달성했다. 퀸의 앨범은 전세계적으로 2억장이나 팔렸고(내가 들었던 백판은 이 숫자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 결과 머큐리는 28개의 방과 12개의 테라스가 달린 조지 왕조시대 양식의 저택에서 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 성공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성적 지향을 보다 솔직히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주었으며 1979년에 발표한 아랍풍의 노래 <Mustapha>는 자신이 이방인이란 사실을 은밀히 드러낸 곡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열망과 성공 뒤에 몰려오는 공허와 고독은 하나의 공식으로, 머큐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다른 밴드 멤버들이 결혼하여 부부 동반으로 함께 어울릴 때 그곳에서 늘 겉도는 프레디 머큐리의 모습은 어쩌면 프레디 머큐리의 본질이었는지도 모른다. 브라이언 메이가 솔로로 독립하려는 프레디 머큐리를 말리며 “우리는 가족이었다”라고 말하자 프레디 머큐리는 고함치며 대답한다. “천만에! 우린 가족이 아니야. 너희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잖아. 그런데 난 뭐야.”

<보헤미안 랩소디>

경배를, 퀸 폐하에, 프레디 머큐리에, 파로크 불사라에

밴드 신리지의 리더 필 라이넛을 늘 ‘이중의 이방인’(아일랜드인-흑인)이라고 여기고 있었음에도 프레디 머큐리에게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퀸은 너무나도 인기 있는, 잘나가는 밴드였다. 그럼에도 퀸이란 밴드는,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대학 가요제 출신의 멤버들이 만든 밴드에, 기지촌 밤무대 출신의 혼혈-게이 보컬리스트가 들어가서 정상으로 이끈 밴드, 바로 그것이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기 전에 나는 40년 동안 그 사실을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웸블리구장의 10만 관객 앞에서 펼쳐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눈물이 났다. 그것이 영화라는 사실을 잊은 채 나는 1985년 <라이브 에이드> 무대의 스탭이 된 것처럼 무대 위를 돌아다니며 환희에 젖어 음악과 화면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것은 40년 만의 퀸과의 화해였다. 그전에는 하나도 좋지 않았던 <Radio Ga Ga>가 그토록 멋진 노래인지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것은 영화의 힘이었다. 내가 정말로 퀸을 몰랐다는 사실을 영화가 알려준 것이다. 퀸 폐하에게 경배를. 프레디 머큐리, 아니 파로크 불사라에게 경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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