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 힘껏 화를 내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래봤자 대부분 소용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거리를 둔다. 그리고 다시 마음이 단단해지면, 그때 다시 할 수 있는 걸 한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일에는 이런 생존 전략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최소한의 사회정의’가 무너졌다고 느낄 때 내 마음은 폭주 모드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을 때 거리를 두는 일은 더욱 쉽지 않다. 그럴 때는 그냥 쏟아져오는 감정을 맞이한다.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파도 속에 들어가면 파도를 느끼지 못하듯, 이 역시 나를 보호하는 방법이다.
가장 어려운 순간은 어떤 인과관계도 없이, 갑자기 어떤 사건이 머리 속으로 직접 ‘들어오고’ 실제로 비슷한 고통을 그대로 몸으로 느끼게 되는 경우다. 아주 가끔 그런 경우가 생긴다. 대리 외상(vicarious traumatization)이라 하기도 하는데, 주로 트라우마 생존자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한다. 내 경우에는 2, 3년에 한번씩 찾아온다. 너무 바빠서 마음의 상태를 잘 들여다보지 못했을 때 “이제는 정말 쉴 거야”라는 마음이 ‘생각’이 아니라 ‘감정’이 되는 바로 그 순간, 고통은 몸으로 직접 찾아온다.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피하지 못했던 그 찰나의 순간에 나는 스스로를 죽도록 원망했다. 얼마나 아플지 알고 있으니까. 이 상태에 진입하면 몸이 생체 실험을 당하는 것처럼 아프다. 잠을 전혀 잘 수 없다. 타인의 사건을 내 몸으로 직접 겪는다. 어떨 때는 피해자의 목에 들어온 칼날을 있는 그대로 느낄 때도 있고, 가장 최근에는 내장이 타는 냄새를 그대로 맡기도 했다. 이번에는 여성의 신체에 주먹을 넣고 장기를 뜯어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징역 4년형을 받았다는 국민청원을 읽고, 5일 동안 꼬박 그 사건을 몸으로 겪어내야 했다. 기사에서 읽은 상황 그대로의 상태가 10분 이상 지속되고(영원에 가까운 시간이다), 하루에 서너번은 그 고통 속으로 예고 없이 들어가므로 이 대리 외상은 내가 직접 겪은 그 어떤 고통보다도 끔찍했다.
증상을 완화시키는 방법은 일단 땅에 몸을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고, 손으로 나 자신을 쓰다듬는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하나씩 펴고, 내 몸을 하나하나 느끼고, 그렇게 천천히 호흡을 한다. 잠시 모든 것을 끄고 수영을 하거나 달리기를 한다. 고마운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좋아하는 음식과 음악과 영화와 고양이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에서 피해자의 곁을 지키며 정의롭게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꼭 건네고 싶은 말이 있다. 분노가 우리를 고통 속으로 사로잡히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의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 그 힘을 길러야 한다. 사랑이 없이는 분노도 할 수 없다. 시인 조리 그레이엄은 물었다. “진실은 얼마나 멀리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깊이 들여다볼 수 있으며 그러고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는가?”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우리 모두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