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펼쳤을 때 텍스트의 질만큼이나 책의 크기, 디자인, 가지고 다닐 때의 편의성 등이 중요해졌다. 정돈된 디자인의 문고판이나 컬러풀한 시집 한권을 가볍게 들고 다니는 독서인들을 지하철에서 부쩍 자주 만난다. 문고판 시장을 주도해온 문학과지성사(이하 문지)의 스펙트럼 시리즈 역시 새로운 책들과 돌아왔다. 사실 돌아온 스펙트럼 시리즈의 표지를 보고 시간의 흐름이 새삼스러워 웃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황순원까지 폭넓은 작가 선정, 함성호의 건축 에세이나 드니 디드로의 배우론, 릴케의 시집 등 문학과 비문학을 넘나드는 작품의 다양성이 돋보였지만 차마 표지가 세련되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던 이전 시리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시리즈의 연결성보다는 해당 작품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심플한 접근(작가의 얼굴 사진만으로 표지를 채운다거나, 책 제목이 <추리소설>이라고 해서 표지에 온통 물음표를 채웠던 표지)만이 전부였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디자인’이 전면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세월의 변화가 느껴졌다. 물론 마땅히 좋은 변화이다. 물론 문지다운 작품 선정 역시 훌륭하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첫 책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작가의 대표작 <연인>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탐구하는 소설이다. 언어유희처럼 보이는 자기 탐구속에 주인공들은 끝없이 절대적 사랑을 찾아 나선다. 5권의 책 중 특히 재미있는 것은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이다. 독서 에세이인 이 책은 책에 대한 책인 셈인데 책을 읽지 않으려는 아이와 어른의 전쟁으로 시작한다. 독서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가르침을 늘어놓는 것 같다가도 ‘건너뛰며 읽어도 좋고, 완독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허락하는 결말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편해진다. ‘인간’이라는 한 단어에 들어 있는 넓은 우주를 고민하는 5권의 고전은 우리 삶의 목록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불행의 궤적
살인의 시대였다. 지루한 홍수처럼 전쟁이 집단적인 광기를 인간의 정념 구석구석에, 몸의 빈틈없는 구석구석에, 숲이며 도로, 하늘에 범람시키고 있었다. 〔……〕 거리에서 미치광이 어른들이 광분하고 있던 그 시대에, 온몸의 피부가 매끌매끌하고 밤색으로 빛나는 솜털밖에 없는 이들, 대수롭잖은 악행을 저지른 이들, 그중에 비행소년이 될 경향을 지녔다고 판정되었을 뿐인 이들을 줄곧 감금하는 기묘한 정열이 있었다는 사실은 기록해둘 만하리라.(<새싹뽑기, 어린 짐승 쏘기>, 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