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에서 출발해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휴전선 아래 파주까지 도착하는 세 남매의 여정을 함께하고 있다. 실은 지난 11월 2일부터 지금 촬영 중인 영화 얘기다.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경험을 만드는 행위다. 직간접 경험이 녹아든 시나리오를 토대로 스탭과 배우는 또 다른 실제 세계를 함께 창조하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관객은 영화라는 그 경험의 결과물을 극장에서 경험한다. 4년 전, 그해 여름부터 겨울까지 진주에 사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썼다. 지금도 그 계절에 한 일이 시나리오를 쓴 건지 어느 가족을 ‘만난’ 일인지 기억이 종종 헷갈린다. 경험은 또 다른 경험으로 이야기가 되었고, 이듬해에 그 가족이 지나갔던 길과 머물렀던 장소를 되짚어 사진에 담았다. 이어서 만화를 그리는 작가가 그 사진과 시나리오를 가지고 꼬박 일년 동안 그들의 얼굴과 공간을 자신의 손으로 그려내는 경험을 했다. 이후 그 그림과 활자를 담은 책이 나왔고, 또 누군가는 감사하게도 만화로 먼저 세 남매와 가족을 만나는 경험을 했을 터이다.
지난봄부터 그 가족을 다시 새롭게 만날 준비를 했다. 다행히 운 좋게도 몇몇 기관에게 제작 지원을 받아서 적지만 소중한 예산을 마련했다. 함께 서로 땀 냄새를 맡을 동료들도 모았다. 배우들을 초대했다. 이제 배우들은 온전히 자신만의 눈빛과 호흡으로 각 인물들을 경험해야 한다. 스탭들은 이야기 속 사람들이 앞으로 한달 남짓 동안 길 위에서 경험할 세상에 대해 함께 연구했다. 배우들이 입을 옷과 손으로 만질 물건, 먹을 음식과 머물 장소를 찾고 또 찾고, 고민하며 선택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 중 일부는 이야기의 가족을 꿈에서 먼저 조우할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각자의 기억과 상상으로서가 아니라 현재의 인물들로 대면해야 할 순간.
요즘 우리는 하루하루 한 가족의 경험을 만들고, 목격하고 있다. 프리 프로덕션 당시 기상관측 사상 최고 기온을 기록하던 날이 현재는 핫팩의 온기가 절실한 계절로 바뀌었다. 영화를 만드는 시간들도 각자 인생의 일부고, 함께 모여 땀을 흘리는 행위도 저마다 삶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촬영 일정 동안 이야기 속 인물의 삶을 마주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 일상을 인식하면 잠시 어리숭하다. 마치 꿈에서 깼을 때처럼 기분이 얼얼하다. 두 세계의 간극이 제법 깊다. 시차 적응이 필요할 만큼.
배우와 스탭이 함께 수십번 반복한 경험들은 빛과 소리의 시공간으로 기록되고 그중 일부가 미래의 관객에게 영화로 전달될 것이다. 저 너머의 당신이었던 사람들이 우리가 되는 순간이다. 영화를 통해 나의 경험이 우리의 경험이 되고, 동시에 나와 다른 당신의 경험이 된다. 제일 처음 어느 가족을 만났던 개인의 경험은, 우리를 통과해 당신에게 가닿고 당신은 그들을 겪는다. 우리의 경험에 당신의 경험이 포개어지길. 경험이 경험을 만들었고, 그 경험이 다시 또 다른 경험을 만들 근사한 기억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