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으로서의 페미니즘은 비판적 실천 학문이라는 계보 속에 있다. 그런데 페미니스트의 비판은 종종 파시즘적 광기를 동반한 비합리적 감정의 분출로 간주되거나(‘페미 파쇼’), 성차별 반대라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잔인해질 수 있는 나치(‘페미 나치’)로 묘사된다. 파시스트든 나치든 모두 지독한 국가주의자들인데, “여성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외쳐왔던 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어리둥절할 일이다. 페미니즘은 지금까지 보편으로 간주되어온 지식의 권위를 묻고 또 물으며, 권력의 작동 과정을 심문하고 그 자신이 권력이 되는 것을 경계해 왔고, 그렇기 때문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 실천’은 페미니스트로서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비판이란 무엇인가. 1978년 5월, 푸코는 ‘비판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비판이란 곧 ‘알고자 하는 용기’라고 정의했다. 앎이란 무엇인가. 여기에서 앎을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라고 한다면, 무엇이 지식이고 무엇이 권력인지를 단순히 서술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러한 앎은 주체를 다시 ‘맥락’이라는 조건에 종속시킨다. 지식-권력 연결망(knowledge-power nexus)의 작동 원리를 통해 무엇이 어떻게 인식 가능하고 수용 가능하게 되는지를 포착할 수 있게 되면. 이때 앎은 주체를 탈예속화(de-subjectification)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그야말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앎 역시 끝없이 갱신되지 않으면 타락한다. 비판적 태도란 예속되지 않으려는 의지 그 자체이자 자유로서의 앎을 실천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분석의 매 순간 지금 현재 우리가 다루고 있는 지식이 무엇이며, 이것을 지식으로 만드는 권력이 어떻게 실행되는지 ‘알고자 하는 용기’는 페미니즘 지식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입문’ 단계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자 하는 용기가 필요했다면, 그다음에는 상호 비판 과정에서 의견을 수정할 수 있는 용기가 요구된다.
페미니스트 영문학자 리타 펠스키에 의하면, 의견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면서 기꺼이 서로를 비판하는 동시에 스스로가 가진 생각에 의문을 품어보고, 필요하다면 과감히 낡은 입장을 폐기하는 등의 융통성을 발휘해야만 페미니즘은 생명력 있는 이론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적 기반을 공유하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과도 언제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최근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백래시(사회 변화 등에 대한 대중의 반발)라는 개념에 의존하면서 모든 비판을 반동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견을 가진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게 된다. 물론 글의 서두에 쓴 것처럼 상대가 나를 파시스트나 ‘정부요원’으로 취급하는 상황에서 대화를 이어나가려는 시도는 쉽지 않은 일이다. 가짜뉴스와 사기 행각이 공론장을 망치고 있는 상황에서 이상적 대화와 합리적 토론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한 바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저들이’ 우리를 끌어내려도, 우리는 결코 같이 끌려 내려가지 않겠다는 마음이야말로, 사기꾼과 도둑이 창궐하는 이 시대에 필요한 용기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