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조>(2016)의 김성훈 감독이 내놓은 신작 <창궐>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좀비와 흡사한 외모와 특징을 지닌 괴물 야귀에 맞서는 민초와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권력가들의 몰락을 다룬 이야기다. 한때는 마니악한 장르영화의 소재였던 좀비가 이렇게 한국 상업영화에서 자주 ‘창궐’할지 누가 알았을까. 장르영화의 속성을 다양하게 변주하는 <창궐>은 액션 연기에 있어서 별다른 이견이 필요 없는 현빈, 장동건 두 배우를 앞세워 액션 블록버스터로서의 근사한 볼거리를 끊임없이 쏟아낸다. 즉 할리우드의 수많은 재난영화에 익숙해 있던 관객에게는 이전의 한국영화가 다루지 않은 좀비라는 소재를 마음껏 드러낸다는 점에서 만족감을 줄 것이고, 배우의 멋을 즐기고 싶어 하는 팬들에게는 아주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할 것이다. 좀비영화라는 장르적인 테두리 안에서도 <창궐>의 독창적인 액션이 보여준 성과는 추켜세울 만하다. 도전적인 소재를 보다 대중적인 화법으로 풀어내고자 고심한 김성훈 감독을 언론 시사회 직후 만났다.
-올해 1월에 진행했던 인터뷰(<씨네21> 1138호 “한국영화 톱 프로젝트 16 - <창궐> 김성훈 감독, ‘액션의 힘을 최대한 보여준다’” 참조)에서 <창궐>을 기획하게 된 계기에 대해 소개한 적 있다. 아무래도 <공조>의 흥행이 <창궐>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데 많은 도움이 됐을 것 같다.
=<공조> 이전부터 개발하던 프로젝트였지만 <공조>가 흥행하지 않았다면 아무래도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됐을지도 모른다. <공조>는 관객으로부터 기대 이상의 사랑을 받은 것은 감사하지만연출자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많았던 영화다. 주어진 예산이 액션영화를 위한 예산은 아니었기에 디테일에 신경 쓰기 어려웠다. 편집실에서 느꼈던 좌절감이 <창궐>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줬던 것 같다. 그리고 그즈음에 확신을 갖게 해주는 이미지 같은 게 떠올랐다.
-그게 어떤 이미지였나.
=몇 가지 장면에 관한 이미지였다. 첫째로 불타는 인정전 지붕에서 펼쳐지는 액션의 이미지. 명운을 짊어진 이들의 혈투가 펼쳐지는 와중에 싸움을 돕 위해 모여든 백성들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인정전의 이미지도 떠올랐다. 실제로 그곳을 가보면 생각만큼 크지 않다는 사실에 놀란다. 영화에서는 과장해서 묘사했지만, 그곳에서 느껴지는 권력의 속성이 중요했다. 크고 높지만 안에서는 껍데기처럼 차갑고 건조한 이미지가 나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흰 도포가 점점 더러워지는 가운데 변화해가는 이청(현빈)의 모습. 애초 기획했던 그룹 액션에서 이청의 액션에 집중하는 영화로 변모하게 된 계기를 줬던 이미지다. 그리고 제물포라는 공간. 정치로 인해 결국 아픔을 떠안는 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폐허가 된 제물포 구석 어딘가에서 모여 살아야 하는 현실의 한계를 정서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조선시대와 괴수의 조합, 정치까지 얽히게 되는 구성은 얼마 전 개봉한 허종호 감독의 <물괴>(2017)가 먼저 시도했다. 이와 다른 전략을 지닌 할리우드영화나 예술작품을 참고하지는 않았는지.
=뭔가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레퍼런스를 찾아보는 것이 나에게는 도움이 안 되더라. 너무 좋은데 따라할 수도 없고 안 따라하기도 어려운 딜레마만 안겨준다. 어려서부터 좋아한 게 영화이고 이를 업으로 삼는 입장에서 내 안에 나만이 기억하는 수많은 레퍼런스가 있다는 믿음이 있다. 연출부에도 레퍼런스를 찾는 건 하지 말자고 하는 편이다.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이용하자는 주의다. <공조>에서 림철령(현빈)의 두루마리 휴지 액션도 60가지가 넘는 아이디어 중에서 거의 마지막에 하나 건져낸 것이었다. 따라하려 시도했다면 그렇게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장르의 재미와 더불어 정치적인 울림도 안기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촛불 민심을 보여주는 듯한 장면이 그렇다. 연초에 가졌던 인터뷰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는 기획의도도 밝힌 바 있다. 이는 시대극에 담아낼 수 있는 감독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은데.
=메시지라기보다는 내가 그저 궁금했던 질문을 던져보자는 정도였다. 언제부턴가 권력의지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접하면서, 그게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궁금했다. 그러니까 공공성을 위해서 개인의 의지와 욕망을 드러내야 한다는 건데 그건 생각할수록 상충하는 것 아닌가. 그것을 통해 어떤 아이러니를 드러낼 수 있겠다 싶었다. 선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무기를 들고 자신의 의지가 선하다고 굳게 믿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권력의지를 놓지 않는 모습을 잘 활용하면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거기에 촛불 민심을 담았다는 평가는 좀 부담스럽고, 그 움직임이 이청을 바꿔나간다는 정도를 보여주고 싶었다. 백성들이 명확하게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이청이 강한 자극을 받는 것은 당시 조선으로서는 엄청난 성취였을 것이다. 누구도 피하지 않는 행위가 만들어낸 결과물. 관리와 책임은 늘 함께하는 거라고 배워왔지 않나. 그런 사람들의 행위가 보여주는 변화가 희망적이라면 좋겠다는 의도가 있었다.
-야귀라는 존재의 근원을 마치 서양 문물이 들어오듯 조선으로 흘러들어온 존재라고 설정했다.
=완벽한 장르영화를 추구했다면 야귀의 근원을 한국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표현할지를 두고 더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창궐>에서는 야귀의 출처에 관해 간단하면서 설득력 있는 정리가 필요했다. 거기에 더 많은 사연을 설명하다 보면 오히려 의문점이 많아질 거라 판단했다.
-현대가 배경이었다면 인간과 야귀가 대치하는 상황에서 다양한 전투 환경을 묘사할 수 있었을 테지만, 상대적으로 조선이 배경이기에 물리적인 한계를 고려해야 했을 것 같다. 때문에 야귀에게 핸디캡을 줘야 했을 텐데.
=좀비와 뱀파이어의 특징을 적절하게 섞어서 야귀의 컨디션을 명확하게 표현해야 했다. 그래야 싸움의 룰을 정할 수 있으니까. 관객이 이해하기 쉽게 정확한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했다.
-야귀의 등장 규모에 관객이 깜짝 놀랄 것 같다. 한국영화에서 보기 어려웠던 충격적인 비주얼이다.
=이 장르의 가장 큰 특징은 규모에서 오는 쾌감이라고 판단했다. 야귀를 연기한 배우들이 정말 고생했다. 3개월 이상 트레이닝한 배우들이 80여명, 보다 짧게 트레이닝에 응했던 배우들이 또 그만큼 된다. 인원이 매우 많았지만 그들이 추운 날씨에도 고생을 해줘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매주 두번 이상 연습하며 동작과 소리를 모두 만들어냈다. 신세를 많이 졌다. 그들이 없었다면 컷을 길게 숏의 폭을 넓게 보여주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CG엔 한계가 있으니까. 영화에서 한번도 맨 얼굴을 드러내지 못한 그들을 위해서 엔딩 크레딧에 증명사진을 모두 실어줬다. 전부 모이면 삼겹살을 사기로 했는데 그 약속도 꼭 지키겠다. (웃음)
-야귀의 춤사위 같은 안무는 누가 만들어냈나.
=현장에 두명의 안무가가 야귀 배우들을 코치했다.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친구는 조한준이라는 배우가 맡아서 가르쳤다. 지금은 <미스터 주>(가제)라는 영화에서 판다 역할을 맡고 있다. 성실하게 배우들을 잘 이끌어줬다. 그 친구에게 고마움을 많이 느낀다.
-<창궐>은 클로즈업을 잘게 쪼개서 빠른 호흡을 보여주기보다는 풀숏으로 보여주는 액션 장면이 굉장히 많다. 특히 이청의 액션을 다룰 때 촬영 컨셉이 두드러진다. 연초에 가졌던 인터뷰에서는 김태강 무술감독에게 “최대한 컷 수를 적게 쓰면서 흔히 말하는 검술 액션은 하지 말자고 제안”했다고 말한 바 있다. 화려한 액션보다는 정서적인 액션의 힘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잘 반영됐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인정전에서 보여주는 현빈의 액션이 울림이 크다.
=촬영하는 내내 끝까지 강조했던 지점이다. 일반적으로 칼의 움직임을 살리기 위한 클로즈업이나 칼 돌리기 같은 무술적인 요소가 없다. 액션과 리액션의 힘이 동시에 담기는 풀숏과 누가 더 빠르게 다음 공격을 이어가면서 찰나를 뺏느냐에 집중했다. 이런 액션의 방향이 동양화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배우들은 굉장히 많은 연습을 해야 했다. 이청의 기본 무기를 참마도라는 무기를 본떠 만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무술팀과 컨셉에 관한 이견이 없었나.
=<공조>에 이어서 김태강 무술감독과 이번에도 함께 작업했는데 내가 무술팀에 요구했던 것은 일부러 크게 표현하는 리액션을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아마 무술팀은 노이로제에 걸렸을 거다. (웃음) 내가 숙련된 자세를 정말 싫어한다. 리액션 엔지는 그런 지점에서 발생한다. 많은 것을 요구했지만 즐겁게 받아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궁수로 등장하는 덕희(이선빈)의 활을 이용한 액션 또한 굉장히 돋보였다. 가장 현대적인 분위기의 액션을 표현하는 인물 같았다. 그리고 덕희의 액션 컨셉이 후반부 극의 흐름을 만드는 데 잘 활용된다.
=활은 칼보다 물리적으로 가볍고 더 빠르게 쏠 수 있다. 궁수를 활용한 이유는 원거리의 저격이 가능하다는 점, 빠른 움직임 속에서 창의적인 공격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활을 쏠 때 연이어 쏘는 동작을 어떻게 이어갈지도 고민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취향을 담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마이 리틀 히어로>(2012) 때는 아이가 경연장 무대 위를 날아오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공조>에서는 현빈씨가 줄을 타고 건물로 들어가는 장면이 등장하고. 하늘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선호한다. 이번에는 어떤 장면을 담을까 고민하다가 떠올린 것이 날아가는 화살의 이미지였다.
-<공조> 개봉 직후 인터뷰에서 대중적인 코드, 즉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영화를 강조하는 인상을 받았다. <창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이 영화가 지닌 오락성을 힘주어 이야기했다. 연출자로서 분명한 태도를 잊지 않으려는 다짐 같기도 한데.
=편하게 접근하는 영화가 내게 더 잘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어려운 건 종종 편한 영화가 쉽게 뻔해진다는 거다. 뻔하면 캐스팅도 힘들고 투자도 힘들다. 그걸 뛰어넘는 편안함이라는 것은 동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즐겁고 유쾌하면서 생각의 단상이 자연스레 녹아 있는 영화, 나는 그 정도가 딱 좋다.
-처음 영화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1990년대에 ‘전람회’라는 그룹이 있었다. 내 친한 고등학교 동창들인데 전람회 공연 콘서트 때 쓰일 오프닝과 엔딩 영상을 만들었다가 반응이 좋아서 그다음 공연 영상도 제작하게 됐다. 관객이 내 영상이 아니라 전람회를 보고 환호한 것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내 영상을 보고 환호하는 쾌감이 강하게 다가왔다. 앞으로도 이런 영상을 계속 만들고 싶다고 마음먹고는 대학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마이 리틀 히어로>를 연출하게 됐다.
-공교롭게도 동명이인인 김성훈 감독은 드라마 <킹덤>을 준비 중이다. 하필 연출한 작품 개수도 비슷하고 활동 시기도 겹치니 서로의 존재를 모를 수 없겠다.
=잘 모르고 지내다가 이번에 <킹덤>과 <창궐>을 서로 연출하게 되면서 알게 됐다. 정서적으로 비슷한 영화를 하고 있다는 동질감을 느껴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를 계기로 오히려 친해졌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소재의 작품을 하다보니 서로 힘든 것도 잘 알게 됐다. 피해 갈 수 없으니 서로 응원하는 게 맞다. (웃음) 나보다 훨씬 영화 잘 만드는 감독이니, 가끔 그분으로 오해받는 게 기분 좋다.
-<공조>의 남북한 공조 수사라는 소재도 <창궐>의 조선시대 배경의 야귀라는 소재도 상업영화의 테두리 안에서 도전할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였다. 그럼에도 상업성을 놓지 않으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다음 영화는 어떤 규모의 작품이 될까.
=여러 가지를 고민 중이다. <창궐>은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한계를 시험해본 영화다. 이제 무엇이 부족한지 알았으니 그런 고민을 안고서 보다 규모가 적은 영화적 공기를 담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 또 하나는 <공조>와 <창궐>의 연장선상에 놓인 믹스된 상업영화를 고민 중이다. 어떤 작품이 먼저 제작에 들어갈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하지는 않을 것 같다. 실패하더라도 해봐야지. 거기에 즐거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