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EBS국제다큐영화제에서 상영한 허윤수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과를 졸업한 언니들과 나>의 첫 장면은 감독이 제작한 단편영화의 엔딩 크레딧으로 시작한다. 다큐멘터리 속 화자인 나는 영화과를 졸업하고 영화를 만들어 원하던 감독이 되었다. 이 사실로 다큐멘터리를 시작한 이유는 아마도 현실은 지금부터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다큐에는 화자를 포함해 모두 영화 만드는 일을 꿈꿨으나 영화와 무관해 보이는 일을 하고 있는 주변 인물들이 등장한다. 영화 찍을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영화를 공부하는 동안 대출받은 학자금을 갚기 위한 것도 있다. 월세는 각자가 벌어 함께 부담하지만 그 또한 만만치 않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또 다른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은 언뜻 해묵은 ‘청춘의 현실과 이상’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로또 당첨 1년 후 근황”이라는 제목의 글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 드러나지 않은 지점을 생각하게 한다. 1년 전 로또 1등 당첨자 인증을 했던 글 작성자는 이후 자신에게 생긴 변화를 담담하게 전한다. 예상과 달리 여전히 다니던 직장에 다니고 있으며, 남들이 보기에 겉으로 드러난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가 체감하는 일상의 변화는 정작 로또 당첨으로 흔히 기대하는 물질적 차원의 향유가 아니라 심리적 안정감이었다고 한다. 가장 큰 변화는 일상생활에서의 자신감이었고, 업무 중 꾸중을 들어도 주눅 들지 않게 되고,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닐 경우엔 당당해질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돈이 쥐어져 있다는 사실이 가져다준 마음가짐과 태도의 변화에 주목했다.
이 시대는 로또 당첨이 인생 역전을 담보해주지 못하는 시대일지 모른다. 수억원이라고 해도 서울 시내에서 그럴듯한 아파트 한채 사기에도 부족한 금액일 수 있다. 하지만 인생 역전은 다른 데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꿈꾸는 인생 역전은 어쩌면 대단하고 거창한 부가 아닌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갖는 것일지 모른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한번쯤 도전해볼 수 있는 기회의 제공. 그리고 도전에 실패하거나 실수를 해도 내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거란 믿음 말이다.
로또 당첨 후 누린 1년간의 변화상이라는 것은 어쩌면 복지사회가 추구하는 기본 조건은 아닐까. 대학 졸업 후 여전히 학자금 빚을 갚기 위해서, 월세를 내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청춘의 모습은 복지사회에서는 당연하지 않다. 숨만 쉬고 살아도 생존에는 돈이 든다. 일상의 디폴트 값은 어느덧 기본 값이 아닌 목표치가 될 만큼 높아졌다. 누군가는 그 기본 값을 충당하기 위해 경쟁하고, 오늘을 담보하며 구슬땀을 흘린다. 간신히 턱걸이를 해서 내 몸 하나를 그 첫 단계에 올라서게 만든다 하더라도 나와 내 가족에게 행여 예기치 못한 일들이 생길까봐 불안해하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