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에는 대가가 있다. 공동체에서 떨어져나온 인간은 이 세계에서 그리 복된 삶을 살지 못하지만”이라고, 20년 넘게 이어진 독일 뮌스터에서의 생활에 대해 허수경 시인이 쓴 산문집 <너 없이 걸었다>에 적혀 있었다. 그는 독일어를 배우고 10년이 지나서야 독일어로 쓰인 시를 읽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향수병을 뜻하는 ‘하임붸’(Heimweh)라는 말과 대칭을 이루는 ‘페른뵈’(Fernweh)라는 단어를 알려준다. “먼(Fern)이라는 단어와 슬픔(Weh)이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먼 곳을 향한 그리움, 동경 내지는 사무치게 그리운 어떤 심정을 뜻한다.” 독일에서 날아온 허수경 시인의 부고를 접하고, 내내 이 고독과 슬픔이라는 감정을 생각했다. 그 감정 안에 머물 수 있는 이국의 땅을 택한 시인을 기억했다.
타고난 나라와 언어 속에 머물지 않고 나라와 언어를 독일과 독일어로 선택해 이주해 살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60년대생 여성 작가가 또 한 사람 있다. <현등사> <영혼 없는 작가>의 다와다 요코다. 다와다 요코의 <여행하는 말들>은 그녀가 살고 있는 베를린부터 서울, 바르셀로나 등의 도시 이야기를 담은 1부와 독일어 단어들에 대한 생각을 담은 2부로 되어 있다. 다와다 요코는 일본어와 독일어 모두를 창작의 도구로 삼는데, 그래서인지 챕터 제목과 무관하게 전부 언어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 프랑스의 프랑스어와 세네갈의 프랑스어(식민지의 언어), 독일인의 독일어와 일본 출신 독일인의 독일어(이민자의 언어) 등의 사유가 이어진다. “나는 A어로도 B어로도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A어와 B어 사이에서 시적 계속을 발견해 떨어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절멸의 위기에 처한 작은 언어를 구하는 구급차 역할을 짊어진 문학이라는 관점 역시 흥미롭다. 한국어로 예를 들면, 제주도 방언으로 시가 쓰이고 있어야 그 언어가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게 다와다 요코의 생각이다. 나아가 작은 언어가 모어인 사람은 시인이 될 확률이 높고, 그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번역이 이루어지면 “소멸하는 어휘, 사고의 리듬, 말투, 그림, 신화가 번역의 형태를 거쳐 큰 언어 속으로 ‘망명’을” 한다. 그러면 더이상 전과 같을 수는 없다. 사유는 언어를 바꿔입으며 계속 ‘틈’ 안에 머물며 여행한다. 그리고 인간이 사멸한 뒤에도 글은 남는다. 허수경의 우주는 여전히, 그 시는, 그 산문은 여전히 오늘의 지구에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