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
어린 시절 그는 <미워도 다시 한번> <별아 내 가슴에>를 보며 문희에 대한 연모의 정을 키웠다. 그녀의 초롱한 눈빛에 유하는 황홀경에 빠졌고, 그녀가 눈물을 흘리면 그의 마음속에는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쑈하는 사람들이 저 스크린 뒤에 들어가 가짜로 연극하는 게 영화야”라는 금자라는 동네 누나의 말을 믿었던 그는 영화가 끝나고 나면 눈물 훔칠 새도 없이 후닥닥 스크린 뒤로 달려가 문희의 체취를 느끼려 하기도 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안 리, <십계>의 앤 백스터, 아니 ‘안 박스터’ 역시 그가 추앙한 여신들이었다.
이소룡
이소룡은 그에게 둘도 없는 절세의 영웅이었다. 극장 갈 돈이 넉넉지 않았던 어린 날, 그는 <사망유희> <당산대형> 같은 영화가 답십리극장 같은 재개봉관에 도착하기를 간절히 기다리곤 했다. 유하의 입을 빌려 이소룡의 세계를 한마디로 묘사하면 “모든 복잡을 뚫고 단숨에 핵심에 이르는” 것이다. 후대의 성룡이나 주윤발 같은 액션스타와 달리 그는 머뭇거림 없이 단박에 적을 제압해냈다. 그를 통해 그는 학교생활의 고단함을 떨쳐버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에 관한 정보를 구하려다 일본 <스크린> 같은 잡지를 접하게 됐고, 지독한 키치중독에 빠지게 된다. 김성수 감독과 그를 이어준 끈도 이소룡이었다.
무협지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주인공 영훈에게는 실제 유하의 모습이 많이 투영돼 있다. 극중에서 영훈이 무협지 출판사 사장인 최주봉의 설득으로 무협지를 썼던 것처럼 그 역시 무협지를 썼다. 대학 졸업 뒤 어찌 알게 된 출판사 사장의 강권으로 무협지를 쓰게 된 그는 당시 장당 50원의 원고료를 받았다. 당시 필명만은 밝힐 수 없다는 그는 작품 속에 ‘작가적’ 필치를 담으려 했으나, ‘더 황당하고 더 야한’ 내용을 원하는 사장(그는 출판사 사장이나 영화제작자나 비슷한 구석이 있다고 말한다)의 뜻을 이기지 못해 ‘범작’을 양산했다. 이때의 기억은 훗날 <武林일기>를 통해 드러난다.
세운상가
70년대 강남은 아수라장이었다. 번듯한 신부유층의 자제들 틈에 잡초처럼 섞여 있었던 강남 ‘원주민’ 아이들은 삐딱한 길을 걸었다. 그때 유하는 이들의 책상 아래서 분홍빛 육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을 봤다. 이른바 ‘빨간 책’에 유혹당한 그는 세운상가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도 안 가고 이곳에 출근하다시피 한 ‘세운상가 키드’ 유하는 “태양 아래 새로운 환락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압구정동
그가 강남에 당도한 70년대 말, 압구정동의 풍경은 배밭과 판잣집이 어우러진 그것이었다. 그곳에 살던 학교 친구들이 하나둘 ‘철거’라는 메시지만을 남기고 전학갈 때만 해도 압구정동이 어떤 모양새를 갖게 될지 유하는 알지 못했다. 훗날 <시인 구보씨의 하루>를 찍으러 압구정동을 찾은 그는 10여년 전의 이미지와 심한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을 느낀다. 여기서 시상(詩想)을 얻은 그는 양귀자의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라는 단편소설 제목에서 착안,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쓰기 시작했다. 압구정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 시집은 엉뚱한 곳에서도 반향을 일으켰다. 압구정동 술집 주인들이 ‘압구정 문화의 전파자’라며 그에게 공짜 안주를 제공했던 것이다. ▶ <결혼은, 미친 짓이다 >로 돌아온 감독 유하, 시와 영화의 나날들
▶ <결혼은, 미친 짓이다 >로 돌아온 감독 유하, 시와 영화의 나날들 (2)
▶ 유하와 친구들
▶ 유하의 키워드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