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 모그라비의 영화를 보고 싶은가. 그러면 당장 유튜브 사이트에 접속해 ‘아비 모그라비’를 검색하면 된다. 아비 모그라비의 거의 모든 작품을 영어자막 버전으로 볼 수 있다. 영상을 올린 이는 아비 모그라비 자신이다. 영화에 등장한 셀프카메라 속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오늘날 만연한 인터넷 1인 방송을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든다. 그는 자신의 집을 스튜디오 삼아 카메라에 대고 (상상의 관객에게) 끝도 없이 말한다. 스크립트를 외워서 하는 건지 어느 정도는 즉흥적인지 헷갈린다. 자연히 이것이 다큐멘터리인지, 픽션인지도 모호해진다. 카메라를 바라보는 화자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지만 때론 노래를 부른다. <Z32>(2008)에서는 소규모 오케스트라단을 뒤에 둔 채로 진지하게 노래한다.
이번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소개된 <어찌하여 나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아리엘 샤론을 사랑하게 되었는가>(1997, 이하 <어찌하여>)와 <Z32>는 그로테스크하고 약간은 유머러스한 표현 뒤로 꽤 도발적이고도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아비 모그라비의 (혹은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해설 또는 고백이 필수 요소처럼 보이는 이유도 그러한 완충지대를 거치지 않고서 영화가 담고 있는 질문을 받아들이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의 아리엘 샤론은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있던 민간인 3500여명을 학살한 사브라 샤틸라 학살 사건의 배후 조정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자신을 좌파로 인식하는 아비 모그라비가 샤론을 취재하다가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감화되며 겪는 내적 갈등이 반허구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Z32>는 팔레스타인 경찰 2명이 사살된 보복 작전에 가담했던 군인이 여자친구와 자신이 벌인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포함된 영화다.
<어찌하여 나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아리엘 샤론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두 영화를 나란히 놓고 보았을 때 두드러진 변화는 영화에 등장하는 매체의 변화다. <어찌하여>에서 인물이 아리엘 샤론과 접촉하기 위해 집에서 내내 커다란 전화기를 붙잡고 있다거나 카메라를 들고 이동하는 모습에서 드러나던 육중한 매체성은 <Z32>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Z32>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건 취재원 보호를 위한 디지털 마스크다. 디지털 마스크는 얼굴을 뒤덮은 전체 모자이크에서 시작해 눈과 입을 오픈한 모자이크 등으로 영화가 전개되는 동안 얼마간 옅어진다. 감독은 자신의 집이자 스튜디오에서 검은 복면으로 머리 전체를 뒤덮은 채로 카메라에 등장한다. 그는 눈과 입 위의 복면을 잘라내는 퍼포먼스를 벌이다 나중에는 복면을 벗어던진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취재원과 비슷한 입장에 잠깐 자신을 내던지며, 감독이자, 코러스이자, 분신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새긴다.
디지털 마스크의 묘한 지점은 그것이 점점 옅어질 때, 내가 보는 얼굴이 진짜 얼굴인지, 디지털 마스크를 쓴 얼굴인지 어느 순간 헷갈리게 된다는 것이다. 얼굴에 닿은 인물의 손이 모자이크되는 것을 볼 때야 비로소 인물의 얼굴 위에 디지털 마스크가 여전히 존재함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지각의 불완전함을 자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만연한 조작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거꾸로 인식하게 한다. 지각 불가능함에의 자각은 두 영화 속 인물을 판단하는 것으로부터 관객을 멀리 떨어뜨리는 이유가 된다. 악인을 가까이서 만났을 때에도 그에게 저항할 수 있을까. 나와 가까운 사람이 저지른 악행에 관해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결국 누군가에 관한 명료한 판단을 유보시킨다. 어쩌면 범죄자의 얼굴을 가린 디지털 마스크는 화면 위가 아니라 우리의 망막 위에 붙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