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오랜만에 수다를 떨었다. 그날의 수다는 즐거웠고 여운이 오래갔다. 우리의 수다는 수다 자체에 관한 것이기도 했다. 다들 목적 없이 자유롭게 온갖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갈망하고 있었다.
나는 덧붙였다. 즐거운 대화는 “삼천포로 빠지는 대화”이다. 미리 주어진 지침이나 지도를 따라 이루어지는 대화는 재미가 없다. 자꾸만 샛길로 빠지는 대화, 함께 길을 잃고 찾는 여정에서 신기하게 생긴 돌과 나무를 발견하는 대화가 재미있다.
사실 나의 “수다 예찬론”은 사회학자들의 대화론에 빚진 것이다. 리처드 세넷은 <투게더> 책에서 “대화적 대화” 개념을 제시한다. 대화적 대화의 참여자들은 합의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대화 속에서 참여자들의 상호작용은 긴밀해지고 그들의 이야기는 두터워진다. 세넷은 대화적 대화를 “연주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데도 연주자들은 서로에게 자극을” 주고받는 재즈에 비교한다.
사회학자 게오르크 지멜은 <사교의 사회학>이라는 에세이에서 목적이 없고 그 자체로 흥분과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대화를 “놀이”에 비유했다. 지멜에 따르면 그러한 대화는 삶을 짓누르는 의무로부터의 해방감을 제공한다. 그는 말한다. “인생의 진지함을 결정 짓는 실체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놀이는 즐거움과 상징적 중요성을 획득한다.”
그날의 수다에 참여한 누군가는 “항상 목표가 분명한 말을 하다 보니 목표가 없는 상황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대화에서마저 준비된 말을 통해 최단 시간에 논리적으로 목표에 도착하는 법에 익숙해진 나머지 길을 잃고 노는 법을 망각하고 있다. 즐거운 수다는 늘 시간이 길어진다. 말의 양도 양이지만 대화 중간에 “어…”, “글쎄…”, “흠…” 등으로 표현되는 멈춤과 헤맴의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러시아 문학 연구자 김수환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대화에는 “머뭇거림이 있는 말”이 가득하다고 했다. 그런 말들은 얼굴을 마주한 사람 앞에서 즉석으로 떠오르는, 준비되지 않은 생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는 문학과 관련한 행사에 초청돼 청중들 앞에서 말할 기회를 가졌다. 그 자리에는 오랜 시간 우정을 나눠온 나의 친구가 함께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내게 말했다. “예전에는 눌변이었는데 이제 달변이 되었네.” 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반성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느새 나도 세련되고 그럴듯한 말들을 준비해놓았다가 청중에 맞추어 내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나는 다시금 수다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지멜은 자유로운 대화를 “예술”에 비유했다. 수다 속에서 생각은 미완성의 공예품처럼 나타난다. 사유는 협력의 시간과 고독의 시간 모두를 필요로 한다. 사유는 유희적이고 예술적인 대화에서 형성된 생각의 편린들을 성찰하고 다듬은 결과물일 때가 많다.
수다스러운 눌변가들, 놀이하는 사람들이자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면 나는 기꺼이 일원이 될 것이다. 그 세상이 어떤 체제일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더라도 재밌고도 심오한 세상이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