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과 암호화폐에 매료된 지 세달째다. 비트코인을 포함한 암호화폐가 해킹 우려가 있고, 최근 화폐 가치가 바닥을 치고 있는데 웬 암호화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주식 투자하듯 암호화폐 거래소 창을 노트북에 띄워놓고 돈 놓고 돈 먹기 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스팀잇’이라는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플랫폼에서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를 하나씩 알아가고 있다. 그러다가 어쩌면 블록체인이 영화산업의 구조적 문제를 투명하게 해결해줄지도 모르겠다는 공상(?)에까지 이르렀다. 다소 무모해 보이는 생각을 하게 된 사연이 다음장부터 펼쳐진다.
블로그에 글만 올려도 돈을 벌 수 있다고? 세달 전 지인으로부터 “‘스팀잇’을 하는 게 어떠냐”는 권유를 받았을 때 귀가 솔깃하면서도 한편으론 의심이 들었다. 스팀잇이 대체 뭐기에 글의 양이나 종류와 상관없이 쓰기만 해도 돈을 준다니. 지인의 말에 따르면 스팀잇은 글, 사진, 동영상 같은 콘텐츠를 블록체인에 기록하고, 스팀이나 스팀달러 같은 암호화폐를 콘텐츠를 올린 사람에게 보상해주는 데 성공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매체라고 한다. 블록체인? 암호화폐? 스팀잇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블록체인에 관심 없던 내게 그 두 단어는 암호나 마찬가지였다. 수차례 재판을 하면서 평소 취재를 기록해야겠다 싶어 스팀잇에 계정(https://steemit.com/@pepsi81)을 어렵사리 만들었고, 적금 붓듯 거의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 세달이 지난 지금 재미 좀 봤냐고? 그 대답은 미루고, 가장 큰 변화는 블록체인과 암호화폐가 뭔지 ‘1’도 몰랐던 내가 거래소에서 암호화폐를 사고팔 수 있게 됐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스팀시티에서 사람들이 준비해온 상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암호화폐와 실물경제를 연결시키려는 시도
스팀잇은 ‘돈(암호화폐) 놓고 돈 먹기’ 하는 보통 거래소 거래와 다른, 새로운 블록체인 플랫폼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나 블로그처럼 스팀잇 또한 글(이나 사진, 동영상)을 쓰고 공감(페이스북의 ‘좋아요’ 기능을 스팀잇에선 ‘보팅’이라고 한다)하는 기능으로 운영된다. 기존의 SNS가 재주는 사용자가 부리고 돈은 트위터나 페이스북이 챙기는 구조로, 보상이라고 해봐야 고작 ‘좋아요’나 댓글뿐인 데 비해 스팀잇은 글을 올리는 사람도, 댓글을 다는 사람도, 공감(보팅)을 하는 사람도 모두 스팀과 스팀달러 같은 암호화폐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또 보팅 금액을 좌우할 수 있는 스팀파워 또한 보상으로 주어진다. 스팀잇에서 하는 모든 활동을 암호화폐로 보상 받는다는 얘기다. 이곳이 광고 하나 없는 청정구역인 것도 그래서다.
지난 3개월은 스팀잇이라는 망망대해에서 ‘스티미언’(스팀잇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들과 신뢰를 쌓는 시간이었다. 책·영화 리뷰, 취재원들과 나눈 대화, 그 대화를 통해 느낀 생각들, 취재원과 함께 간 맛집 등 일과를 일기처럼 기록했다. 경험이 없어 실패했지만 영화 <허스토리>가 개봉하기 전에는 극장 ‘밋업’(오프모임 혹은 단체관람)을 추진하기도 했다. 보팅을 많이 받은 포스팅도,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스팀잇이 암호화폐로 보상을 받는다는 것 외에 블로그와 뭐가 다른지, 스팀과 스팀달러를 어떻게 실물경제에서 쓸 수 있는지 궁금하던 차에 ‘스팀시티 미니 스트릿 인 서울’(이하 스팀시티)이라는 행사가 지난 6월 30일과 7월 1일에 열려 아이를 데리고 찾았다.
스팀시티는 스팀잇에서 활동하는 몇몇 사람들이 암호화폐와 실물경제를 연결시켜보려는 시도를 하는 프로젝트다. 서울시 합정동에 위치한 한 카페를 대관해 작은 시장을 연 것이다. 소비자와 판매자가 스팀달러로 맥주, 초, 방향 스프레이, 드립백커피, 닭강정, 정장, 가죽지갑 등 다양한 상품을 사고파는 풍경을 보면서 암호화폐 거래가 현금이나 일반 신용카드 거래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기자 또한 아이를 위한 방향 스프레이 하나와 맥주를 샀다. 거래소에서 그래프와 숫자로만 존재하던 스팀달러로 시장에서 물건을 구매해보니 신용카드 결제만큼 빠르고 안전하며 편리했다. 수수료가 없고, (암호화폐로 결제 가능한 곳만 많다면) 환전 없이 일상에서 통용될 수 있고, 아이핀 공인 인증서가 필요 없다는 점에서 암호화폐는 무척 공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스팀시티가 창작자(나 제작자)와 소비자(스티미언)가 대리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거래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플랫폼 사업자의 배만 채워온 기존의 플랫폼과 달리 스팀시티의 시도는 창작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공정한 거래를 마련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스팀시티가 블록체인의 개념을 시장이라는 형태로 그림을 그린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블록체인은 데이터를 저장하는 방식이 우리가 이제껏 사용해온 컴퓨터와 다른 기술을 가진 새로운 컴퓨터 생태계다. 이름대로 데이터(거래기록)를 ‘블록’에 담아 ‘체인’ 형태로 연결해 여러 컴퓨터를 하나처럼 움직이게 하는 컴퓨터(혹은 네트워크)다. 거래(나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전세계 모든 컴퓨터에 데이터를 복제해 저장하는 까닭에 속도가 빠르고, 데이터를 훨씬 더 안전하고 투명하게 보관할 수 있다. 쉽게 설명하면 스팀시티에 참여한 사람(블록)들이 스팀잇(체인)에서 연결돼 서로가 가진 콘텐츠(데이터)를 올리고, 보상(거래기록)을 받으며, 시장에 나와 직접 거래를 하는 풍경이 영락없는 블록체인의 얼굴이다.
인터넷 세상이 되면서 인터넷뱅킹과 온라인 결제가 자리잡았듯이 암호화폐는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조성된 생태계에서 필요한 새로운 지불 수단이다. 비트코인은 수만개에 이르는 암호화폐들의 원조 격이다(거래량이 많아지면서 네트워크 효율성과 스마트콘트랙트 등 기술적 업그레이드가 필요해졌고, 이후 이더리움을 필두로 특정 목적성을 가진 블록체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비유를 하면 블록체인이 암호화폐를 거래할 수 있는 (시)장이라면 암호화폐는 화폐다.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플랫폼인 스팀잇에서 스팀이나 스팀달러라는 암호화폐로 보상을 받거나 스팀시티에 나가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얘기를 떠올리면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 점에서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블록체인
내가 블록체인에 빠졌다는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한때 비트코인에 손을 댔던 이원석 감독(<남자사용설명서>(2012), <상의원>(2014))이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슬레이트 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가 할리우드에서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시도하고 있는데, 공동 창업자 중 한명이 서울에 출장을 오니 만나보라는 내용이었다. 블록체인을 장착해 여러 사업을 활발하게 시도하고 있는 금융, 보험, 의약 산업 등과 달리 영화를 포함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선 블록체인 움직임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어떤 회사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넷플릭스, 아마존, 훌루같은 스트리밍 산업이 성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창작자와 자본 사이에서 힘의 불균형이 견고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야말로 블록체인 같은 혁명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지난 7월 11일 서울에서 피어스 콘란 프로듀서의 소개를 받아 코디 핵먼 슬레이트 엔터테인먼트 공동 창업자를 만났는데, 그와 나눈 대화는 흥미진진했다(68쪽 참조). 코디 핵먼 공동 창업자는 “한국은 전세계에서 인터넷 기술이 가장 뛰어난 동시에 영화, 드라마 같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국가”라며 “그 점에서 한국이 블록체인의 출발점이 될 수 있고, 이후 블록체인과 관련된 트렌드를 주도할 거라고 판단했다”라며 서울을 찾은 이유를 말했다.
슬레이트 엔터테인먼트는 크게 세 가지 비즈니스 모델을 구상하고 있다. 첫째, 빈지(BINGE)는 블록체인 주문형 비디오로, ‘블록체인판 넷플릭스’라고 보면 된다. 미국의 프라임 시간대에 인터넷 트래픽의 1/3을 사용하는 넷플릭스와 달리 빈지는 전세계 인터넷망을 공유하는 마스터 노드 기술이 적용돼 넷플릭스보다 몸집이 가벼워 스트리밍 속도가 훨씬 빠를 거라고 한다.
둘째, 슬래틱스(SLATIX)는 영화, 연극, 공연 등 엔터테인먼트를 감상하기 위한 블록체인 전자 발권 애플리케이션이다. 수수료가 거의 발생하지 않고, 콘텐츠를 감상해야 리뷰를 남길 수 있으며, 스팀잇처럼 리뷰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데다가 위조를 방지할 수 있는 티켓이 발급된다. 슬래틱스는 10월 5일 열리는 제51회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시체스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인다. 관객은 슬래틱스를 통해 영화제 상영작을 예매하고, 티켓을 발권 받을 수 있다. 프로그래머이기도 한 미케 호스텐치 시체스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블록체인은 새로운 기술로 영화제의 선봉에 설 수 있다고 믿는다. 티켓 발권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 배급, 상영 전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티켓 발권 시스템은 기존의 시스템보다 더 빠르고 안전하며 투명하다”고 시체스영화제가 티켓 발권 시스템을 슬래틱스로 바꾼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시체스영화제는 앞으로 슬레이트 엔터테인먼트, 빈지와 협력해 블록체인을 콘텐츠 제작, 배급, 상영에 어떻게 접목시킬지 고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셋째, 슬레이트는 암호화폐로 빈지를 구독하고, 슬래틱스를 통해 티켓을 구매하는 데 활용된다.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 결제하는 과정에서 수수료가 거의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많은 수익이 창작자에게 돌아가고, 플랫폼은 전세계 인터넷망을 활용하는 까닭에 경제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으며, 소비자는 보다 좋은 화질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데다 리뷰를 남기면 별도의 보상까지 받게 된다는 얘기다.
코디 핵먼은 “할리우드에서 콘텐츠 제작자와 콘텐츠를 배급하는 배급사나 상영하는 극장의 관계는 여전히 불공정하고, 그들이 수익을 분배하는 과정이 투명하지 않다”라며 “블록체인은 지금 산업보다 투명하게 수익을 분배하고, 그로 인해 더욱 창의적이고 완성도가 높은 영화가 제작될 수 있게 하는 도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할리우드의 많은 메이저 스튜디오 또한 블록체인에 관심이 많은 동시에 블록체인이 자신의 사업에 영향을 끼칠까봐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아직 산업에 안착하진 않았지만 다소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슬레이트의 시도가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 궁금하다.
암호화폐로 영화 투자가 가능하다면…
할리우드와 스페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은 변화들을 지켜보면서 블록체인이 남 얘기만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만나는 영화인들의 열에 아홉은 “블록체인에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바람이 한번 불면 너도나도 우르르 몰려가는 게 또 한국이 아닌가. 감히 상상을 해보면 자본과 멀티플렉스가 한국 영화산업의 헤게모니를 쥔 지금, 어쩌면 블록체인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데 대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지난 10년 넘게 국회도, 정부도, 영화계도 해결하지 못한 한국 영화산업의 불공정 거래 문제말이다. 가령 시체스영화제처럼 당장 블록체인을 멀티플렉스 발권 시스템에 장착하면, 관객은 콘텐츠를 만드는 데 조금도 기여하지 않은 카드회사에 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되고, 그렇게 되면 제작사와 극장 모두 좀더 많은 수익을 챙길 수 있게 되며, 제작사가 다음 프로젝트를 기획·개발하는 데 숨통이 틔일 수 있지 않을까.
또 블록체인의 스마트콘트랙트 기능을 이용하면 많은 사람들이 암호화폐를 투자해 영화를 제작하는 게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만은 아닌 듯하다. 사모펀드를 구성하지 않으면 개인이 돈을 직접 영화에 투자하는 게 불법이지만, 지금은 암호화폐가 법적으로 화폐로 인정되지 않는 탓에 암호화폐를 투자해 수익을 배분받는 게 가능하다. 이것이 보상을 리워드 형식으로 받는 크라우드 펀딩과의 큰 차이다. 암호화폐로 영화 투자가 가능하다면 그건 스마트콘트랙트 기능 덕분일 것이다. 서면으로 되어 있어 계약 조건을 이해하려면 계약 당사자가 계약서대로 수행해야 하는 기존 계약서와 달리 디지털 명령어로 작성된 스마트콘트랙트는 계약 조건에 따른 계약 결과가 명확하고, 계약 내용을 즉각적으로 이행할 수 있다. 각자의 자산이 연결된 지갑을 통해 상호 합의를 하고 스마트콘트랙트를 작성한 뒤 실행하면 계약을 이행하는데 복잡한 프로세스를 간소화할 수 있다. 프로젝트가 중간에 좌초되더라도 스마트콘트랙트에서 합의된 중단 관련 조항을 따르면 되니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다소 무모해 보이는 이 상상들이 현실이 된다면 제작비에 목매는 영화인들에게 블록체인은 대안이 될지도 모른다. CJ, 롯데, 쇼박스, NEW 등 4대 대형 배급사에 선택되지 않더라도 영화를 접지 않고 다른 선택을 하면 되니까. 너무 앞서 나간 상상이 아니냐고? 영화 <26년>(2012)이 순제작비 46억원 가운데 제작두레를 통해 7억원,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3억8천만원 합쳐 10억8천여만원을 모았을 때 한국에서 제작두레나 크라우드 펀딩 개념 자체가 전혀 없었던 걸 감안하면 막 나간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뢰를 기반으로 한 변화는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
스팀잇 계정을 만드는 법
1. 회원 가입을 한다. 아이디를 정하고, 이메일과 전화번호를 입력한 뒤 전화번호와 이메일 인증을 하면 된다.
2. 스팀잇이 계정을 승인하기까지 기다리기. 보통 1~2주 걸린다. 기자는 1주 만에 승인됐다.
3. 계정 승인 메일이 오면 이메일에 포함된 링크를 클릭해 비밀번호를 받아야 한다. 약관에 동의한다.
4. 가장 중요한 단계다. GENERATED PASSWORD란에 빨간색으로 나온 비밀번호가 마스터 비밀번호다. 이 비밀번호를 복사해 RE-ENTER GENERATED PASSWORD란에 붙여넣기 하면 계정이 승인된다. 비밀번호를 분실할 경우 스팀잇 본사가 절대 복구할 수 없으니 잘 보관해야 한다. 기자는 휴대폰, 컴퓨터 메모장에 따로 보관하고 있다.
5. 아이디와 복사한 비밀번호로 로그인하면 스팀잇 계정 생성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