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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의 섬> 웨스 앤더슨의 스톱모션애니메이션

깐깐한 감독이 세공한 어두운 세계

웨스 앤더슨이 <판타스틱 Mr. 폭스>(2009)를 3D로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을 때 사람들마다 해석이 분분했다. ‘3D 컴퓨터애니메이션이라는 건가?’, ‘아니, 아마도 3D 입체영화가 아닐까?’ 이후에 알려진 결과물은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이었다. 이런 혼선은 그 무렵 종종 일어났다. 팀 버튼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를 3D로 제작할 계획이라고 했을 때도 ‘스톱모션 신작을 하겠다는 말인가?’라는 추측도 끼어들었으니까. 그즈음은 정말 그랬다. 3D라는 말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정작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의 앞날은 어두웠다. 장편 스톱모션애니메이션 제작이 침체기에 들어갔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메이저급 규모의 장편애니메이션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원래 매년 일정 수량의 작품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것이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의 형편이었기 때문에 번영기와 침체기라는 사이클을 적용하는 건 의미가 없다. 다만 고되고 지루하고 손이 많이 가는 전통적 제작방식이 3D 컴퓨터애니메이션의 큰 파도 앞에서 살아남기란 여간 녹록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거대한 증기기관차 앞에서 수공예 운동을 도모했던 산업혁명 때의 애잔한 광경을 연상시켰다.

뜬금없어 보였던 <판타스틱 Mr. 폭스> 프로젝트가 그 결과물을 내놓았을 때, 웨스 앤더슨의 시도는 그저 고루한 옛 전통공예의 답습이 아니었다. 개인마다 평가가 다를수는 있겠지만, 어쨌거나 웨스 앤더슨은 자기 식으로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을 소화해냈다. 깐깐쟁이 새침데기가 카메라 앞에서 인형을 만지작거리는 이유를 여실히 증명했다. 애니메이션 기법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인 스톱모션은 여전히 그를 위한 가능성의 장을 남겨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성취는 <개들의 섬>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개들의 섬>에서 개들이 일본의 역사에서 인간세계 속으로 들어온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세계 밖으로 제거되어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거대한음모가 있다. 그리고 음모는 늘 정치적 해석을 유도한다. 아무래도 제노포비아의 전 지구적 부활 같은 말이 시의적절할 것이다. 그렇다. 동물의 이야기를 한다는 건 우화를 들려준다는 얘기이고, 우화는 현실을 에둘러 찔러본다는 의도일 테니. 이러한 점을 부정할 필요도 없지만, 그것이 전부일 필요도 없다. 어째서 이 우화가 스톱모션을통해서 생명력을 얻어야 했고, 어째서 웨스 앤더슨의 영화로 만들어져야 했는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여우도 그렇고 개도 그렇고, 스톱모션을 위한 캐릭터로 쓰기에는 조금 고약하다. 무엇보다도 털. 털이 지닌 질감을 살리면서도, 매 프레임을 움직일 때마다 펄럭거리거나 헝클어지지 않게 다루기란 쉽지 않다. 인물들이 쉴 새 없이 중얼대어야 하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서는 캐릭터의 입을 부단히 움직여야 하니 한층 더 고난도의 작업이다. 그리고 그 동물 캐릭터가 사족보행이 아니라, 마치 하이힐을 신은 것처럼 가뜩이나 작은 발바닥으로 까치발을 딛듯이 걸어다녀야 한다면 애니메이션 스탭들에게는 여간 고생스러운 작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스 앤더슨의 스톱모션은 이러한 난관을 뻔뻔히 돌파한다. 털이 헝클어지는 게 무슨 대수겠는가 하는 태도 말이다. 까치발 걸음걸이도 극사실주의를 내던지고 능청스럽게 넘어간다. 마치 모던카툰애니메이션처럼 절제되면서도 생략된 움직임으로 눙친다.

더 큰 도전이자 도발은 공간에 대한 해석에 있다. 물론 이때의 공간은 세트로 축약된다.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의 세트를 어떻게 지을 것이며, 그 속에 어떤 방식으로 캐릭터들을 배치하고 움직일 것인가?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인형이 인형인 것처럼, 세트는 세트다. 무리하게 깊이감의 환영을 부여해가면서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 세트를 세트답게 다루려면 그곳을 연극 무대처럼, 그리고 늘 애착을 보여왔던 인형의 집처럼 접근하면 된다. 이때 카메라의 위치는? 무대 위와 속을 자유롭게 휘젓는 대신, 객석에서 바라본다. 그러면 그 무대는 3차원이면서도 2차원 평면이 된다. 원한다면 그 무대 위의 세트를 바로크 연극 무대처럼 가변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이에 대한 스톱모션의 활용 예는 영국 애니메이터 배리 퍼브스가 <스크린 플레이>(1993)라는 단편에서 맛깔나게 구현한 적이 있다. 웨스 앤더슨의 애니메이션에 쓰인 캐릭터 인형 제작은 매키넌 앤드 손더스에서 맡았는데, 배리 퍼브스도 그곳에서 활동했던 경력이 있다. 더군다나 <스크린 플레이>는 가부키 공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처럼 연극적 배치를 영화 카메라로 담는 가운데, 작품들마다 줄곧 정면성을 강조해왔던 웨스 앤더슨의 인물숏에서 오즈 야스지로의 흔적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오즈 야스지로에게 정면성은 주로 가족 구성원간의 미묘하고도 섬세한 감정선을 절제와 침묵 속에서 포착하려는 접근법이었다. 웨스 앤더슨은 이를 뒤집는다. 그의 작품들에서 흔히 볼 수 있듯, 집단적 히스테리 속에서 과부하 걸린 자기독백은 결코 대화로 이어질 수 없다. 이때 머쓱한 표정이 정면으로 잡힌다.

<개들의 섬>을 어느 서구 영화감독이 일본에 대해 갖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평가하는 건 무리수이다. 여전히 일본에 대한 어떤 판타지가 작동한다면, 사실 그것은 일본자체(국가, 문화, 전통)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영화들, 더 정확히 한정한다면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생산해낸 이미지들에 대한 외부인의 종합적 정리가 옳을 것이다. <개들의 섬>에 등장하는 사건들, 그것들의 묘사, 때로는 극중 미디어의 재생산(TV 뉴스 중계부터 종합상황실의 모니터 영상까지) 등은 모두 우리가 일본 애니메이션을 통해 익숙하게 접했던 것들이다. 모든 소동의 저변에 깔려 있는 음모에는 권력지향적 정치인, 폐쇄적이면서도 무능한 군과 경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추구하는 기업, 그리고 그들의 충실한 행동대장인 야쿠자가 어울려 한패를 이룬다. 그리고 그것에 맞서는 소년, 그리고 소녀! 어느 사회, 국가에나 흔히 있는 요소들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애니메이션은 그것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의 시스템으로 너무나 정교히 작동하면서 현재의 체제를 단단히 구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른바 경제적 선진국에서 백주에 벌어지는 정치적 후진성을 말이다.

물론 웨스 앤더슨은 그렇게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모든 것을 치밀하게 설계하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부분과 전체가 하나의 맞물려 돌아가는 세계를 꿈꾸는 자가 결국 맞닥뜨리게 될 종착지의 풍경이 대개는 처음 그렸던 모습과는 크게 다를 것이라는 예감이 있다. 바로 역설, 아이러니. 애니메이션 속 세계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인공적으로 통솔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 배우들의 무표정, 엇나간 대화 사이에 끼어드는 침묵의 타이밍, 서로 떠밀고 소외시키는 장소와 인물의 상황 등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일일이 개입하려는 감독에게 애니메이션은 매력적인 세상이다. 더구나 스톱모션을 제작기법으로 선택했다면, 그에게는 ‘빛’마저도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이 주어진다(이 영화에서 털과 눈동자는 ‘빛’을 부각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이러한 전지전능한 권력을 창작자는 꿈꾼다. 그리고 그러한 권력이 현실세계에서 한 인간에게 주어졌을 때 세상은 더없이 끔찍해진다. 깐깐하고도 새침한 감독은 자신이 만든 가공의 세상 속에 현실의 어두운 면을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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