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연일 폭주했다. 매일 소란스럽게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한 후보자의 스캔들 때문이었다. 특히 그 후보자가 속한 지역의 친구들은 며칠 밤낮 집단 멘붕 상태를 보이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화만 내다 또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다시 화내기를 반복했다. 친구들은 사전 투표일을 넘겨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자 전보다 더 괴롭고 우울해졌다. 그들의 출구 없는 고뇌와 자아분열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덩달아 스트레스를 받을 지경이었다. 결국 선거일이 오기도 전에 탈진한 그들은 모두 체념한 채 종일 관련 유머짤을 퍼나르며 자조적으로 깔깔거리는 경지에 이르렀고 어쨌든 투표를 하긴 했다. 그리고 정작 결과가 발표된 지금에는 아무도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이런 적이 있었다. 많았다. 모든 게 너무나도 익숙한 경험과 감정의 흐름이었다. 중차대한 선택을 앞두고 속속 밝혀지는 충격적인 사건들, 그로 인한 엄청난 분노와 배신감, 부정할 수 없어 겨우 마음을 다스려보지만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분명 편치 않을 것을 이미 아는 열패감과 자포자기의 심정, 그리고 이후 더욱 커질 자책감과 침묵에 이르게 되는 상황까지. 그 결과 도달하는 상태는 언제나 무력감이었다. 분노에서 부정으로, 이후 타협에서 우울로, 마침내 수용을 넘어 체념과 자포자기에 이르는, 이른바 선거의 5단계였다. 성인이 된 이래 대부분의 선거에서 나는 늘 그런 경험을 되풀이했고, 이번에 어김없이 친구들을 통해 간접체험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아닌지. 누가 알까. 선거 내내 일희일비하며 고군분투하는 후보자들보다, 매번 대대적으로 실망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감행하고 책임져야 하는 유권자들의 고통과 상처가 더 깊을지 말이다.
최선이 없을 때 차선을 고르는 것은 꽤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최악이 두렵고 피하고 싶어 할 수 없이 차악을 택하는 문제는 결코 단순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정치학자 프랭클린 P. 애덤스는 “선거란 누구를 뽑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를 뽑지 않기 위해 투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선거는 최선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무엇이 정말 차악일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에서 정말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다들 그저 울며 겨자 먹기 심정이라도 최소한의 권리 행사는 하자는 결심, 그래도 이렇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막막한 믿음뿐일 것이다. 그런 우리의 진심만큼은 부디 상처받아 움츠러들지 않기를 바란다.
어쨌든 우리는 투표를 했다. 이번에도 역시 힘겨운 한표, 한표를 행사한 우리 모두를 칭찬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차악이 아닌 차선을, 그렇게 결국 최선을 선택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