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해왔다. “정권이 바뀌어도 삶의 고통이 바로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일터와 일상의 문제는 오랜 시간 누적되어온 것이며 그 해결은 시민의 주체적 노력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러나 이 믿음은 나 자신에게도 지극히 이론적이다.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을 포용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사실 나는 크게 위로받았다.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해 그토록 진정성 어린 말을 건네는 모습은 사뭇 감동적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정권이 바뀌고 ‘이제 세상이 좋아질 것 같아’라고 “내심”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바람은 언제부턴가 낙심으로 바뀌고 있다.
사측이 약속한 고용 승계와 단체협약 이행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은 수개월을 굴뚝 위에서 농성 중이다. 새 정권이 공약으로 제시한 최저임금제는 출발부터 노동자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삶의 터전에서 철거당하다 손가락을 잘린 임차인은 임대인에게 망치를 휘둘렀다가 구속됐다. 페미니즘을 내걸고 당당한 시선으로 포스터를 찍은 서울시장 후보를 향한 혐오는 도를 넘었다.
나는 우울감에 사로잡힌 나 자신에게 마치 상담사처럼 말한다. ‘정권이 교체된다고 세상이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잖아? 상처받고 힘들어할 필요 없어. 원래 생각으로 돌아가면 돼.’ 그래, 원래 생각으로 돌아가 상황을 파악해보자.
최저임금제 논란은 저임금 체계와 하도급에 의존하는 한국의 불합리한 경제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영업자들에게 가장 큰 위협은 최저임금이 아니라 임대료 상승이다. 바로 그 자영업자 중 한명은 하루아침에 범죄자가 되어 법이 을의 생존권보다 갑의 투기욕을 보호해준다는 사실을 서럽게 깨닫는다. 페미니즘이라는 말 한마디가 맞닥뜨리는 숱한 분노와 조소는 한국의 여성혐오가 뿌리 깊은 인종주의와 다를 바 없다는 점을 드러낸다. 원래 생각으로 돌아가니 더 절망적이다. 모든 것이 얽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구조, 언제쯤 입법이 돼 효과를 발휘할지 모를 법, 뼛속 깊이 스며들어 제2의 본능이 되어버린 사고방식. 어떤 진보의 물결이 이 가혹한 힘들을 거스르고 바꿔낼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원래 가졌던 믿음에 따르면 진보는 오랜 시간, 아니 오랜 세월이 걸리며 성공 확률도 매우 낮다.
시민이 일상과 일터에서 구조의 힘을 바꾼다는 믿음은 늘 현실에 압도되고 배반당한다. 하지만 정권 교체에 따르는 진보의 주기는 비교적 짧고 성공 확률도 높다. 영웅적 지도자로부터 진보의 물결이 시작된다는 드라마는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이렇게 단기 진보에 대한 믿음이 장기 진보에 대한 믿음의 대체재로 부상한다.
하지만 이 매혹적이고 편리한 믿음은 나쁜 믿음이 될 수 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정권 교체가 진보 그 자체라고 믿는다. 그것이 지난하고 머나먼 길을 가는 데 도움을 주는 여러 수단 중 하나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말이다.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진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권력과 자원의 공정한 분배 요구를 향한 노골적 반감”이 소위 진보 진영 내부에 공존할 것 같다. 아니, 이 분열적 사태는 이미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