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극작을 배운 적이 있다. 첫 수업에서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주인공은 현재를 바꾸기 위해 애쓰거나 원래대로 되돌리려 움직이는 인물이라고. 잘못된 현재를 고치려 하거나 평온한 과거로 돌아가려 하는 것. 최정화 소설집 <모든 것을 제자리에>를 읽으면서 그때 선생님의 말을 떠올렸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파괴되고 헝클어진 현실을 돌이키고 싶어 한다. 엉클어진 상황을 지켜보는 인물들을 원동하는 감정은 ‘불안감’이다. 이들은 불안하다. 현실이 이상과 달라서 불안하고, 과거보다 망가진 지금을 인식하고 있어서 불안하다. 삶은 계속 망가져갈 것이고 어디까지 추락할지 모른다. 이것은 소설 속 인물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불안하다. 은퇴 후 미래를 알 수 없고, 지금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삶은 계속 망가져갈 것이므로 불안하다.
소설집 맨 앞에 수록된 <인터뷰>의 주인공은 촉망받는 학자였지만 인터뷰에서 일어난 사고로 인해 명성도, 가족의 신뢰도 잃고 만다. 그를 인터뷰하러 온 기자를 실수로 다치게 했고, ‘운이 없게’도 기자는 실명을 한다. 사고였지만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사건에 감정이 없었다고도 할 수 없다. 그가 재조명한 과거는 진실과 다르고 기억과 함께 실재했던 세계는 수정된다. 작가는 소설 속 세계를 새로이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완벽한 소설적 세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황현경 문학평론가의 설명대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지금 그 세계를 바로 지금 그 세계로 만드는 것, 그래서 그 이야기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을 지금 그 세계로 받아들이고 바로 거기서 살게 하는 것,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이야기’인 것이다. 최정화가 축조한 세계는 이미 여기에 존재하는 세계다. 그것은 탁자 모서리에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로이 서 있는 유리잔처럼 불안하고 그래서 지켜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평상심의 상태로
나는 아직도 그날의 거리를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매우 선명하게 떠올릴 수가 있다. 거리에는 담배를 만 종이처럼 하얀 겨울나무가 빛도 없이 조용히 빛나고 있었고 가끔 경적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인파의 흐름을 간헐적으로 흐트러뜨렸다. 그 거리를 바라보며 나는 세중이 왜 전화를 받지 않는지 대신 내가 왜 그렇게 세중에게 전화를 걸어댔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또 그가 전화를 받았을 때 왜 엉뚱한 말을 하고 그냥 끊어버렸는지 물었다. 왜 그랬느냐고 물었다.(134-135쪽)